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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음악자리] 소월의 시가 노래가 된다는 것

by 웹진수이제 2026. 4. 23.

 

소월의 시가 노래가 된다는 것

김리안 (더하우스오브리나 대표)

 

 

  소월과의 재회, 백 년 동안의 변형

  하대응을 만났다. 김동진을 만났고, 김순남을 만났다. 이영조와 변훈, 안성현과 정미조 그리고 송골매도 있다. 이들을 통해서 김소월을 다시 만났다. 소월은 가장 먼저 만났던 이였고, 다시 새롭게 만나게 된 이다.

 ‘눈물 아니 흘리며’ 상대방을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라고 했으나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라 했던 이. 작품의 화자와 작가가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만, 이를 쉽게 구분하지 않고 우리가 받아들이는 존재. 소월을 우리는 보통 중고등학교 시절에 만난다.

 

2022년 12월 26일 국제소월학회가 부산에서 창립되었다.  출처: 창립총회 동영상 캡쳐

 

  소월은 1902년에서 1934년까지 살았다. 그의 작품은 그 기간 안에 생산되었고, 이는 그의 작품들이 지금까지 존재한 기간이 백여 년 정도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백 년. 한국 현대사의 역동성을 상기해 본다면, 이는 그 이전의 백 년과는 밀도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그의 시들이 담고 있는 태동될 당시의 감성과 분위기’가 백 년이라는 시간의 벽을 통과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놀라울 때가 있다. 그 놀라움은 ‘소월 시 그 자체의 심미성에서 기원했겠지만, 그 심미성에 공감하고 사로잡혀서 이를 그들만의 방식으로 재생산한 이들의 손에서 유지된 면이 있다. 내가 만난 이들은 음악을 하는 이들이었고, 그들이 소월의 시를 재생산한 방식은 노래였다.

 

  시가 음악이 될 때 노래가 된다

 

1925년 출판사 매문사에서 간행된 초판본이 2010년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출처: 국가유산청.

 

  소월의 시가 노래가 되어 계속해서 옷을 갈아입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는 점은 문학이라는 매체가 음악이라는 매체로 다시 태어날 때, 노래라는 음악의 하위 장르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의 고전시가들이 낭송되기보다는 불리어지는 노래의 가사였다는 것을 상기하면, 이에 직관적으로 공감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문학작품으로 배우는 시조나 가사문학 또는 잡가 등은 오늘까지도 그 선율이 전해지고 있다. 향가나 고려 가요 등 조선시대 이전의 고전시가들 또한 불리어지는 노래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곤 한다. 때문에, 시가 음악이 될 때 노래의 형태를 띄는 것은 오래된 전통이자 앞으로도 그러할 오래된 미래이다.

 

  노래가 아닌 형태로 시를 나타낸 음악도 있다. 대표적으로 19세기 초중반에 서유럽 음악계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난 표제음악적 전통이 그것이다. ‘본격적’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그 이전에도 이런 류의 음악은 주류로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크 시기 프랑스의 건반음악이나 비올음악의 작품들이 그 예다. 여기에는 대상으로 삼은 또는 재창작의 영감이 된 문학의 어문 그대로의 내용은 나타나지 않는다. 가사 없이 음악만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바탕으로 한 멘델스존의 곡이나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를 그려낸 드뷔시의 곡, 괴테의 작품을 나타낸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 등이 그 예다.

 

  더더욱 문학작품이 시일 때, 음악이 되고 노래의 형태로 되는 경우가 많다. 가사가 온전히 또는 약간 변형된 형태로 담겨져서 그 내용의 구체성이 음악 속에서 오롯이 또는 음악을 통하여 증폭되어 구현되는 형태인 노래로 재탄생된다.

 

 

  아마도 이는 음이라는 추상적 속성만으로는 언어가 지니는 구체성과 직접성을 드러내기엔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음악적 요소만을 듣는 우리는 그 음악의 소재가 된 문학작품에 대한 정보와 그 정보가 그 음악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 음악을 듣기 이전에 미리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노래는 그렇지 않다. 노래는 직접적인 음악이니까.

  여기서 가사가 먼저일까 음악이 먼저일까 또는 가사의 내용인가 음악적 내용인가 하는 질문이 있다. 서양 클래식 음악사에서 가사와 음악 간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논쟁은, 긴 호흡을 자랑하는 오페라 분야에서 일어난 1750년대 부퐁 논쟁을 넘어서서, 슈베르트가 가곡의 전범을 보여주면서 일단락된다. 가사인 시의 내용과 그 내용을 떠받치고 구체화하며 강화한 음악을 융합하여 시의 정서를 증폭시킨 가곡의 전범에서 후대의 작곡가들은 시를 노래로 만드는 작업’의 기준을 찾았다. 소월의 시를 노래로 재탄생시키고자 한 한국의 작곡가들도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하나의 시, 여러 개의 노래들: <진달래꽃>, <산유화>, <못잊어>와 <초혼>

  그들의 작업은 백여 년간 이어졌고, 음악평론가 이장직이 발표한 「한국 시의 가곡화에 대한 분석」(월간 『문화예술』 1986년 8월호)에 따르면, 이른바 한국가곡 분야에서 1986년까지 발표된 모든 가곡에서 김소월의 시로 된 가곡이 20%에 달했다. 그 과정에서 소월의 동일한 시에 여러 개의 음악이 붙여졌다. 같은 가사를 가진 여러 개의 다른 노래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는, 그 각각의 곡이 가진 심미성과는 별도로, 우리에게 좋은 참고가 된다. 각각의 작곡가들이 하나의 동일한 소월 시를 어떻게 바라보았고 그 시에 어떻게 공감했으며 그 정서를 어떻게 다르게 표현했는지를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재탄생한 소월 시’의 여러 모습과 ‘작곡가들이라는 개인들이 소월 시에 공감한 여러 개의 정서’를 보고 체험할 수 있다.

 

소월의 시를 노래한 우리 가곡 18편 연속듣기 출처 - 유튜브 캡쳐

 

 

<진달래꽃>의 작곡가 김동진과 김순남, <산유화>의 작곡가 김성태와 김순남, <못잊어>의 작곡가 하대응과 김동진 그리고 조혜영, <초혼>의 작가 하대응과 변훈과 심진섭과 임긍수. 이들에게서 소월 시 본연의 정서와 그를 바라보고 그에 공감한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정서, 그리고 그 정서들 각각에 공감하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들 각각이 전달해주는, 증폭되거나 응축된 소월 시의 정서를 체험한다. 그 체험 속에서 우리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현재의 심미성을 준거 삼아, 소월이 그려낸 인간사의 정서를 체험하기도 하고, 작곡가 개인의 다양한 정서를 체험하면서 현재의 심미성과는 다른 미적 기준을 정립하기도 한다.

 

  서양 음악사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괴테와 셰익스피어의 많은 작품들이 노래가 될 때, 하나의 같은 시에 여러 명의 음악가들이 곡을 붙였다. 그리고 그러한 곡들의 개별적 가치를 별론으로 하면서 그 곡들을 어쩔 수 없이 비교하며 듣게 될 때, 우리는 각 곡들이 전해주는, 시의 정서에 대한 작곡가들의 다양한 감응에 공감하고, 가곡 그 자체의 심미성을 구분하게 되며 저마다의 심미적 기준을 새로 세우게 된다.

 

  소월의 시가 노래로 재탄생된다는 것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시가 탄생했을 때 살았던 이들이 그 시를 받아들이는 정서는 오늘의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이들이 그 시를 받아들이는 정서와 달라진다. 당대의 사회문화적 분위기와 풍속 속에서 직접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들었던 정서는 시간이 바꾸어놓은 분위기와 풍속 앞에서 가로막히곤 한다. 아니면, 시간의 두터움 속에서 그 시의 표현과 그 시가 다루고 있는 정서는 지루한 것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화석처럼 된다고나 할까.

  그러나 굳어져 가는 표면 속의 정서를 발견하고 바라보며 공감하는 이들은 있기 마련이고, 그들은 오늘의 말로 그것들을 길어 올린다. 몇몇 작곡가들은, 자신들 당대의 음악적 언어로, 화석화된 그 시를 다시 살아 숨 쉬게 한다. 그리하여 그것들을 우리 곁에 다시 살게 한다.

  

  백여 년의 시간 속에서 소월의 시들이 굳어져 갈 때마다, 그들은 그렇게 그 시들을 재탄생시켜 왔으며 지금도 그 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저마다의 정서와 방법으로 하나의 동일한 시들을 새로운 여러 개로 만들어 숨 쉬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의 정서와 소월 시대의 정서를 연결짓는다.

  비단 한국가곡 분야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른바 클래식 음악이라는 가곡의 테두리를 넘어서서, 대중가요와 동요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샹송 풍의 옷을 입은 <개여울>과 어른을 위한 분위기의 <부모>, 록밴드 음악 속에 담은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등 이들 모두는 오늘의 시간대로부터 ‘저만치 멀리 혼자서 피어있는’ 소월의 시들을 지금 여기에 피워내고자 한 결과들이다.

 

2023년 국제소월협회가 주최한 부산 시내 소월 시비 탐방행사 출처: 《국제신문》 2023. 03. 16.

 

 

 

  그 시가 노래가 되는 작업과 음악적 내부구조

  그렇다면 묻곤 한다, 대체 소월의 시에 음악을 입힐 때, 어떤 음악적 어법과 구조 때문에 노래 자체로서의 매력을 지니는 것이냐고. 어떤 음악적 작업이 소월 시의 어떤 작품이 가지고 있는 정서를 살려내는 것이냐고.

 

  30년 정도 전에 나온 영화 <파리넬리>에서 헨델이 이런 식으로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게 아냐, 여기 이 감정에선 감화음을 써야지”. 일반인과 구별되는 음악가의 특별함을 나타내고자 한 영화적 과장이었겠지만, 특정한 정서를 나타내는 화음이 있다는 식의 작곡 방식이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가사의 단어나 문장이 뜻하는 바에 따라서 음의 높낮이를 연결지어 작곡했던 가사그리기라는 기법은 르네상스 시대에서 바로크 시대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많이 쓰였다.

  우리는 빠른 템포와 높은 음역에서 활발함과 약동 또는 긴장감과 초조함을 실제로 느끼기도, 느낀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느리고 장중한 템포와 단조의 저음역은 슬픔과 비탄 또는 괴로움을 느끼게 하고, 그래서 장송 행진곡 등에 자주 쓰인다. 형식과 구조적 측면에서도 반복과 변형 등의 사용이 어떤 정서를 표현하는 효과가 있다. 이러한 경험적 결과들은 어떤 분위기나 정서를 나타내기 위해서 쓰이는 음악적 기법들이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소월의 시들은 이런 기법들을 적용하기에 유리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소월 시 전반에서 드러나는 75조라거나 음보 와 같은 운율적 특징이나 정형화된 형태 그리고 민요적 특징들을 말한다. 애초에 음악적인 시라서 음악화하기 쉬워 많은 이들이 소월의 노래를 음악화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모르겠다, 마치 하나의 공식이나 외국어의 한 단어처럼 정서와 음악적 기법의 일대일 대응을 나타내는 기법이 있는지는 말이다. 결국 우리가 접하는 것은 하나의 완성된 노래라는 작품의 총체다. 이러한 작품에 대한 유기체론에 나는 좀 더 끌리는 편이다.

  과문한 탓이지 모르나, 내가 만나본 거의 모든 음악 평론이 어떤 곡들을 평한 내용들은 모두 이런 문제들을 피해나갔다. 절대주의 음악관에 따라서 평하면서 화성과 구조적 형식을 분석하였거나, 관련주의 음악관에 따라서 음악 외적인 부분들인 시대적 배경이나 작가의 일생을 해당 곡과 엮는 식이었다. 거기엔 그러한 화성과 구조가 그 곡의 심미성을 만들어내는 이유도 없었다. 대체로 작곡자 당대의 사회적 문제들을 곡에 끌어들여 문학적인 비유를 통하여 그 곡의 아름다움을 주장하는 식이었다. 어쩌면 작품 그 자체에 대한 평론들이 대부분 이런 식인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음이라는 추상적 요소로 이루어진 것을 언어라는 구체적 요소로 설명하려드니 말이다.

 

(좌) 2025년 <길 위의 인문학> 작업의 일환인 ‘소월의 노래’ 포스터.  (우) 2025년  ‘ 소월의 노래 ’  공연 현장 관객 사진

 

 

  새로운 해석으로서의 연주

  그러하기에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연주다. 미감의 제작과정을 설명할 수 없지만 어쨌든 완성된 작품의 총체, 그 총체를 실제 소리로 변화시켜서 관객의 눈과 귀에 물리적으로 다가가도록 만드는 행위인 연주.

  그러한 행위에는 연출이 수반된다. 이는, 내가 보기엔, 필수적이다. 소월의 노래에는 소월의 시가 가지고 있는 내용이 있고, 그것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연주자가 그 시를 이해하고 그 정서에 공감하는 것이 필요하며, 때문에 연주자는 그 결과를 드라마처럼 연주해야 한다. 관객들이 아무 정보 없이 그 연주를 접했을 때조차 소월의 시가 가진 정서를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관객들이 소월의 정서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때문에 관객은 정서와 구조의 측면에서 모두 적극적 청자가 되어야 한다.

 

  소월 시의 현재적 접근

결국 소월의 시는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것 때문에 시간의 벽을 견디는 것일 터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들이 그 벽을 쉬이 넘지 못하기에, 소월의 시가 그 자체의 형태 그대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힘들다. 굳어져 가는 그 시의 정서를 오늘에도 살아있게 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은 작곡가다. 소월 시에 대한 그들의 공감과 그들 개개인의 정서가 합쳐지면서 소월의 시는 노래가 되어왔고, 그 모습으로 우리는 소월의 시를 만난다. 마치 오늘 만들어진 작품인 양. 그러한 만남을 중개하는 과정에 연주가 있다. 언제나 오늘의 작품이 되도록 해야 하기에, 연주는 매너리즘을 경계한다. 그 마지막 참가자로 우리들 적극적 청중이 있다. 비로소 소월의 시는 지속적으로 현재적 작품이 된다.

 

이는, 소월의 시가 노래가 되는 것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누구의 어떤 시가 노래가 되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결국 모든 시가 노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월의 노래’ 연주 현장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