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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

[9호를 내면서] 기술가속주의 철학과 정동민주주의, 그리고 더듬이들

by 웹진수이제 2026. 4. 23.

기술가속주의 철학과 정동민주주의, 그리고 더듬이들

  김봉률 (수이제 발행인)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가 정말 빠르게 액셀레이터를 밟고 있습니다. 현재 기술 발전은 “지수적 가속” 단계에 들어갔다고 평가됩니다. 특히 인공지능·반도체·데이터·네트워크 영역에서 그 속도가 두드러집니다. 인공지능 분야에서는 2배 발전 속도가 몇 달 단위로 빨라지고, 기술가속의 핵심인 컴퓨팅 파워는 2012년 이후 2024 사이 약 10억 배로 증가했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데이터 폭발이라고 할 정도로 세계 데이터 규모는 2010년에 2 ZB에서 2025년에 180 ZB로 가속되고 있어요. 산업자동화는 창작과 연구, 번역 등 지식노동영역까지 확장되고 있구요, 군사기술은 데이터와 인공지능 전쟁입니다.

 

금융권력에서 기술권력으로

이제 기술이 모든 것의 위에 있어 기술권력이라는 말이 자연스레 나옵니다. 1980년 이후 금융권력은 레이건과 마가렛 대처와 함께 등장한 신자유주의의 핵심이었습니다. 실물 생산보다 금융투자, 파생상품, 자산 거래 중심의 경제이며 주주가치의 극대화를 추구해왔습니다. 지나친 탐욕으로 서민들의 주택담보대출금까지 파생상품으로 팔아먹다가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맞이합니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금융권력의 편에 섰습니다. 그 후 미국민들은 민주당의 배신에 분노했고 그 반사이익으로 트럼프가 등장하게 됩니다.

2000년대 이후 힘을 키워가던, 권력을 간절히 원했던 실리콘벨리의 기업가들은 트럼프를 위시하여 권력을 장악해 가고 있습니다. 이제 금융권력에서 기술권력으로 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표기업은 구글, 애플,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테슬라 엔비디아이며 요즘 군사부문에서 특히 막강하게 떠오르고 있는 팔란티어 등입니다. 컴퍼니마켓캡과 위키백과에 따르면, 추정치로 시가총액을 보면, 엔비디아는 4,5조 달러, 애플은 약 4조 달러, 구글은 3.9조 달러, 아마존은 2.3조 달러, 메타는 1,7조 달러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 포함 이들 6개 기업 합계는 약 20조 달러입니다. 우리나라 국내총생산 지디피가 약 1.7조 달러, 일본 지디피가 약 4.2조 달러라 보면, 세계를 좌우하는 막강한 초국가적 권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네트워크 효과와 데이터 축적

금융권력은 돈을 지배하지만 이들은 데이터를 지배합니다. 왜 이 기업들의 개별 시가총액마저 국가 권력 수준까지 커졌는지요? 그 이유의 핵심은 네트워크 효과가 만드는 가속 때문입니다. 사용자가 늘수록 서비스 가치가 증가합니다. 소셜 플랫폼 예를 들면, 사용자 1명일 때는 가치가 거의 없으나 사용자가 10억 명이 되면 압도적 가치를 가지게 되요. 이 구조 때문에 규모가 커질수록 성장 속도가 더 빨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플랫폼 기업은 기하급수적 성장을 보입니다.

네트워크 효과만이 이들 기업의 성장을 가속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플랫폼 기업은 단순한 서비스 기업이 아니라 데이터 기업입니다. 플랫폼이 축적하는 데이터는 검색 데이터만이 아니고 소비 데이터, 행동 데이터, 위치 데이터 등입니다. 데이터는 인공지능 학습의 핵심 자원입니다.

그래서 플랫폼 기업은 인공지능 기술 발전에서도 압도적 우위를 가집니다. 예를 들면 구글은 검색데이터를, 아마존은 소비 데이터를 메타는 소셜 데이터를 축적합니다. 플랫폼 기업의 시가총액 폭발은 단순한 경제 현상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경제 체제를 보여줍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플랫폼 자본주의 또는 기술 봉건주의 데이터 제국이라고 부릅니다.

 

플랫폼제국과 디지털 인프라

앞서 언급한 플랫폼 기업의 시가총액 상승은 자본 집중을 가속합니다. 과거 산업경제 시절에는 여러 기업들이 경쟁을 했고 시장은 분산되었습니다. 하지만 플랫폼 경제에서는 승자독식 구조, 즉 가장 큰 기업이 시장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이 구조 때문에 투자 자본도 계속 대형 플랫폼으로 집중됩니다.

세계적으로 연결되는 네트워크 효과와 데이터의 축적과 집중은 기술권력이 되죠. 기술권력은 데이터 지배를 통해 사회 전체의 행동 패턴을 통제하며, 시장을 운영하는 플랫폼 자체가 됩니다. 아마존은 유통시장을, 구글은 정보 검색을 애플은 앱 생태계, 메타는 사회적 소통 자체를 장악합니다. 곧 이건 디지털 인프라가 됩니다.

미국은 최근 전략적으로 “국방 + 실리콘밸리” 모델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시장만 장악하고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의 핵심부로 빠른 속도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금융권력이 기술권력으로 완전히 교체된 것은 아니고, 벤처캐피털, 기술주 금융화, 데이터 자산 투자 등에서 보다시피, 금융과 기술이 결합하고 있는거지요.

 

신봉건주의와 럭셔리 공산주의

기술과 시장이 상호 가속하는 데다 국가 권력의 위탁 등이 동시에 가속됩니다. 이 현상은 철학적으로 기술 가속주의와 연결되어요. 닉 랜드와 같은 대표적 가속주의자의 관점에서 보면 플랫폼 기업은 자본, 기술, 알고리즘이 결합된 자기 증식 시스템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제안에서 출발한 기술 가속주의 철학은 좌파와 우파라는 두 개의 상반된 정치적 프로젝트로 분열되었습니다.

좌파 기술가속주의는 기술을 해방의 도구로 보고, 포스트 자본주의와 노동 없는 사회를 꿈꿉니다. 기후위기, 생태위기, 불평등 등에 대해 대응하는 여러 진보적 시민운동들이 느리고 소규모이며 지역성에 빠져 있어 신자유주의 시스템을 이길 수 없다고 봐요. 그래서 기술과 자동화의 잠재력을 자본으로부터 되찾아 인류 해방의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완전 자동화된 럭셔리 공산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겁니다. 기본소득과 노동단축, 플랫폼 기술의 공공적 통제를 주장합니다. 대표 철학자는 닉 서르닉, 알렉스 윌리엄스 등입니다.

  이에 비해 우파 기술가속주의는 기술을 비인간적인 과정으로 인식하며, 자본주의의 무조건적인 심화를 주장합니다. 우리의 의지나 행복, 복지, 생존은 이 거대한 과정 앞에서 무의미합니다. 핵심 원칙은 민주주의를 비효율적인 시스템으로 보고, 기업가적 권위주의나 신봉건주의적 질서를 옹호합니다. 기후 위기, 불평등 심화 같은 재앙조차 새로운 질서의 탄생을 위한 필연적 과정으로 긍정합니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지닌 비트코인 같은 탈중앙화 기술에 대한 맹목적 믿음, 규제와 민주적 통제를 거부하는 태도와 접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닉 랜드가 대표적인 철학자입니다. 

 

알고리즘 통치와 시민사회의 실종 

실리콘 벨리의 기업들은 플랫폼과 데이터 그리고 알고리즘을 통해 기술권력이 됩니다. 알고리즘은 단순한 계산 규칙을 넘어서 세계를 조직하는 방식이 되었어요. 알고리즘 통치의 핵심은 ‘무엇이 중요한가’를 미리 계산하고 배분하는 힘입니다. 뉴스 피드, 검색 결과, 신용평가, 치안 예측, 플랫폼 추천, 행정 자동화는 모두 사람들의 행동을 사후에 단속하지 않고 사전에 유도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데이터화와 자동화가 사람들의 반성적 판단을 밀어내고 통치를 보다 미세하고 일상적인 차원으로 침투시킵니다. 그러면 알고리즘은 “정보를 처리하는 기술”을 넘어 사람의 행동을 유도하는 구조가 됩니다.

빅데이터, 알고리즘, 자동화 시스템이 사람의 주의와 욕망을 계산·예측·조정하는 새로운 권력 형태라 볼 수 있어요. 이 체계는 개인의 예지 능력을 박탈하고, 기계적 예측에 종속시킵니다. 결과적으로 사람은 스스로를 만드는 대신, 플랫폼 자본주의가 설정한 규칙에 맞춰 만들어지는 존재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런 통치에서는 시민이 법의 주체라기보다 데이터 패턴의 집합으로 읽히기 쉽습니다. 그 결과 정치는 토론과 설득의 과정이라기보다 예측 가능한 행동의 관리로 바뀝니다. 시민들과 중산층이 사라진 시대, 기술가속주의의 효율성 우위에 따라 비효율적인 민주주의가 사라지는 시대가 되는 겁니다. 그리하여 기술귀족들이 다스리는 기술봉건주의가 되는 겁니다.

 

육체와 사고가 자동화될수록 감정은 어떻게 될까요? 인공지능은 감정을 느끼지 않지만 감정을 알고리즘적 환경으로 설계합니다. 감정노동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플랫폼화’ 됩니다. 감정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 그램 등을 통해 플랫폼화되면 사람들은 감정소비자로 전락합니다. 이제 남는 건 정동입니다. 정동은 감정과 다릅니다. 정동은 아직 감정으로 번역되기 전의 신체적 변화입니다. 어두운 골목에서 누군가 뒤에 있는 느낌이 들 때 아직 ‘공포’라는 감정으로 명명하기 이전에 몸이 먼저 긴장합니다. 이 순간이 바로 정동입니다. 사람은 인지적 존재에 앞서 먼저 정동적 존재입니다.

사실 알고리즘은 감정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정동의 강도를 조절하는 통치입니다. 예를 들면, 도파민 루프를 만드는 추천 알고리즘, 분노를 증폭시키거나 불안을 자극하는 뉴스피드 등입니다. 또한 이성이나 인지는 설득에 머무르지만 정동은 행동을 유발합니다. 시장, 소비 팬덤, 집단행동 모두 정동적 집합이 먼저 형성되고 움직입니다. 다음에 의미가 따라옵니다.

 

기술가속시대와 정동민주주의

그런데 감정이 알고리즘화되고 자본화될수록 가장 저항적인 영역도 감정과 정동입니다. 정동은 감정보다 훨씬 더 많은 계산불가능한 잔여를 남깁니다. 정동은 비합리적이며 돌발적이며 집단적이어서 갑작스런 광장 집회나, 시장의 패닉, 예상치 못한 밈 폭발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브라이언 마수미도 말했듯이 정동은 완전히 코드화되지 않습니다. 정동은 ‘확률모델의 바깥’이 아니라 ‘확률모델을 교란하는 과잉’입니다. 인공지능의 만능성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것도 바로 정동입니다.

 하지만 정동은 방향성을 가지지 않고 본질적으로 선하지도 않습니다. 파시즘적 광기가 될 수도 있고 해방적인 연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신봉건주의로 돌아가느냐 해방적 민주주의로 가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육체와 사고가 자동화될수록 정동은 정치가 됩니다. 자동화는 사실 기술문제가 아니라 정치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자동화의 이익이 누구에게 가느냐를 다투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정동민주주의가 중요해집니다. 정동 민주주의는 그 체계가 포획한 감정의 에너지를 다시 공공성과 연대의 방향으로 재구성하려는 정치적 기획입니다. 상처 입고 불안정한 존재들이 함께 감응하고 판단하며 세계를 공통으로 만드는 과정으로 민주주의를 되돌리려 합니다. 기술가속 시대에 폭주하는 엔비디아, 구글, 아마존, 메타 등 플랫폼제국들에 균열을 낼 수 있을까요? 그들의 부와 권력이 네트워크와 데이터를 제공하는 전 세계 시민들의 존재 덕분이기 때문에 공공성의 요구가 필연적입니다. 공공 인프라 제도화, 기본소득 위한 세금으로의 환수, 디지털 시대의 반독점법 제정 등이 필요합니다.

 

우리 사람들은 항상 선과 악, 사익과 공익 사이에 흔들리는 존재입니다. 정동 또한 개인 내부가 아니라 사이(관계나 분위기)에서 생기기 때문에 ‘공공’을 만들 수도 있고, ‘폭도’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정동 자체가 선이거나 악이 아니라 조직 방식이 갈라놓습니다. 여기서 정동 공공성이 중요합니다. 정동 공공성은 ‘여론’이 아니라 공명하는 감응의 장을 공적으로 돌리고 그 장을 돌봄, 숙의, 상호책임으로 구조화합니다.

이러한 정동의 공공적 훈련에는 정동 리터러시가 필수적입니다. 정동 리터러시의 핵심은 내 반응이 알고리즘적 유도인지 감지하는 능력이며 분노를 ‘적’이 아니라 구조분석으로 전환하는 기술이며 공포를 ‘배제’가 아니라 돌봄의 요구로 번역하는 기술입니다. 시민으로서 최소한 서게 하는 겁니다.  

 

수이제, 정동민주주의를 향해가는 더듬이

  <수이제>에 실리는 글들은 아직 많이 모자라긴 하지만 정동 리터러시를 함양하는 더듬이들입니다. 알고리즘에 지배받는 시대, 기술은 점점 똑똑해지는 데 스스로 무능력하고 배제되는 느낌이 강해지는 시대에 교육이나 미디어, 지역 공동체 차원에서 정동 리터러시 함양이 필요해요. 이번 9호에서는 인공지능의 여러 결들과 정동에 대한 글들을 많이 실었습니다.

  챗지피티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에 대해, 정말 백과사전처럼 챗지피티를 활용해야한다는 도구적 관점에서부터, 비록 챗지피티가 문학 창작도 능숙하게 하더라도 아직 작가가 살아있다는 안도감, 하지만 인공지능으로 상징의 능력이 빈곤화되어 문화의 창조자로서뿐만 아니라 향유자로서도 점차 무능해진다는 상징의 빈곤 등을 다루었습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노예사냥의 정동으로 비평한 글부터 정동적 놀이가 위대한 정오의 시간인 빛의 혁명을 가져왔다는 글, 한글보다는 영어를 더 멋있게 보는 언어적 정동의 문제 등을 다루었어요. 예로부터 내려오는 시서화 수행론이나 바보 호랑이 더피의 역설도 정동 리터러시를 함양하게 하는 글들입니다.

  고전으로 돌아가는 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9세기 위대한 리얼리즘 소설가 발자크의 여러 비평들, 이번에 신설된 음악자리에는 고전인 소월시와 카르멘의 소환이 있습니다. 흥미롭고 다양한 영화비평과 서평들도 잘 살펴봐주세요. 수이제는 세계를 지향하지만 부산이라는 지역과 우리 삶의 현실을 잊지 않습니다. 이번 호 시민정경에는 ‘농산어촌 유토피아와 마을혁신’ 특집을 실었으며 마실에서는 ‘금정산 국립공원화’와 ‘시민공공병원화의 침례병원’, 그리고 작지만 단단한 예술시평을 실었습니다.

 

  끝으로 <수이제> 9호에 흥미롭고 좋은 글을 주신 필자님들과 고생하신 편집위원님들, 그리고 표지사진의 백성욱 작가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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