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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과 비평

[미학과 비평] 백남준, 백남준 그리고 백남준

by 웹진수이제 2026. 2. 4.

 

백남준, 백남준 그리고 백남준 [각주:1]

 

조균래(수이제)

 

 

케이지 앞에서 

올해 1월, 부산현대미술관의 전시장에서 나는 늘어선 나무들 사이에 매달려 있 는 수십 개의 TV 모니터들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거대하게 누워 있는 4미터짜 리 로봇 <걸리버> 너머로 작은 숲처럼 군락을 이룬 설치작품 〈케이지의 숲 – 숲 의 계시〉 앞이었다. 곧게 뻗은 가지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모니터에는 류이치 사 카모토의 연주에 맞춰 오키나와 민요를 부르는 백남준과 샬럿 무어먼의 모습을 비롯하여 백남준의 예술적 스승인 미국의 현대 음악가 존 케이지의 퍼포먼스 등 다양한 영상들이 돌아가고 있었다. 

 

‘케이지’는 ‘존 케이지’이기도 하고 ‘새장’이기도 하며 일본어의 동일한 발음인 ‘계시’이기도 하다. 화면마다 제각각의 다른 영상들이 동시에 흘러나와 서로 간 섭하며 소음을 만들고, 때로는 자연의 어떤 질서로 조율되는 듯 보였다. 나에게 백남준의 작품들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긴 세월을 가로질러 언제나 지금에 당도 한다. 그의 작품들은 혼돈이 주는 당혹함과 상상을 뛰어넘는 기발함에 수반되는 지적 유쾌함이 뒤섞여 낯설고 매혹적인 대상으로 다가온다. ‘이 순간, 내가 서 있 는 세계’를 돌아보게 하고 여전히 유효한 질문들을 던지며 현재의 감각을 끊임없 이 호출하는 동시대성으로 존재한다. 

<케이지의 숲-숲의 계시> 전시 설치 전경(2025, 부산현대미술관).

 

2025년에는 백남준과 관련된 전시와 행사가 유독 많이 열리고 있다. 부산현대 미술관, 백남준아트센터, 서울시립미술관, 세종문화회관 등 국내 주요 기관들은 물론 미국, 네덜란드, 호주 등 세계 곳곳에서 그를 기리는 대규모 전시와 학술행사를 마련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2006년 1월 세상을 떠난 백남준의 20주기를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과 다가오는 2032년 탄생 100주년을 미리 준비하는 성격이 있다. 한국이 낳은 예술가 백남준을 기리는 여정은 그의 업적과 영향을 고려할 때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단순히 ‘위대한 예술가를 기념한다’는 의미에 머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나는 이 기념의 풍경 속에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어떤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왜 백남준의 예술은 21세기에도 여전히 현재성을 지니는가? 그리고 오늘의 한국 사회는 새로운 백남준을 탄생시킬 수 있을까?”

 

비디오아트의 탄생과 확장 

20세기 중반 이후, 전통적인 회화와 조각은 이미 그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다. 텔레비전과 컴퓨터, 위성 중계로 상징되는 대중매체의 시대가 열리면서, 예술은 새로운 감각과 사유를 필요로 했다. 바로 이때 백남준은 전혀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을 준비하고 있었다.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무명의 동양인 작가 백남준의 개인전이 열렸다. 이 전시에서 그는 12대의 텔레비전 수상기를 변조하여 새로운 영상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관람객들이 낯선 장면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벽에 늘어선 텔레비전 수상기들은 더 이상 뉴스를 전달하지도, 드라마를 송출하지도 않았다. 전자 신호는 왜곡되어 화면은 흔들리고 일그러지며, 때로는 기묘한 패턴을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당혹스러워 했고, 동시에 매혹되었다. 그 순간, 텔레비전은 ‘보는 기계’가 아니라 ‘생각하게 하는 예술’로 돌변했다. 바로 ‘비디오 아트’의 탄생을 세상에 알린 순간이었다.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 이 전시가 획기적인 이유는 수동적으로 방송을 ‘시청’하는 기계였던 TV를, 적극적인 예술적 변형의 매체로 전환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전자기 신호를 조작해 화면을 왜곡하거나 분절시킴으로써,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텔레비전의 질서를 해체했다. 백남준은 전자 이미지를 단순 기록 장치로 사용하지 않고, 그것을 조형적 실험의 대상으로 끌어올려 시각예술의 지평을 확장시켰던 것이다. 백남준의 초기 비디오 실험은 음악적 사유와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도쿄대에서 음악사를 전공했고, 독일에서 존 케이지와의 만남을 통해 ‘우연성’과 ‘즉흥성’의 미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텔레비전 신호의 간섭과 왜곡, 우연히 발생하는 노이즈를 작품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바로 케이지의 음악적 사고를 영상 매체에 적용한 것이다. 

1963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 전시 설치 전경. 출처: 미디어아트넷.

2년 뒤, 백남준은 소니의 포터팩이라는 휴대용 비디오 카메라를 손에 넣었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장치였다. 그는 이 카메라로 교황 바오로 6세의 뉴욕 방문 장면을 촬영해 곧바로 갤러리에 상영했다. 이는 세계 최초의 ‘비디오 아트 작품 상영’으로 기록된다. 텔레비전 방송국만이 독점하던 영상 생산권을 개인 예술가의 손으로 가져온 순간이었다. 이후 백남준은 길거리, 공연장,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촬영하며, 영상 이미지를 회화처럼 ‘소재’로 다루는 방식을 개척했다. 또한 그는 무대 위에서 파괴적이고 유희적인 퍼포먼스를 펼치며, 비디오를 ‘퍼포먼스 예술’의 일부로 확장했다. 이는 훗날 비디오 아트가 퍼포먼스, 다큐멘터리, 설치미술 등으로 확산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1970년대 이후,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는 설치와 미디어 조각으로 진화했다. 대표적인 예가 〈TV 부처〉, 〈TV 첼로〉 그리고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 설치된 〈TV 정원〉 등 이다. 특히 불상과 카메라와 TV모니터로 구성된 설치작품인 <TV부처>는 그의 명성을 전 세계 미술관과 대중들에게 알리는데 유효했다. <TV부처>시리즈는 1973년 백남준이 한 불상을 카메라 앞에 앉히면서 시작되었다. 카메라는 불상을 비추고, 텔레비전은 곧바로 그 영상을 송출한다. 불상은 TV모니터에 실시간으로 비춰지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응시한다. 

 

단순한 설치지만, 이 장면은 예술과 철학, 동양과 서양, 종교와 기술이 교차하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엄숙한 불상과 일상적인 텔레비전의 병치는 아이러니하면서도 유머러스하다. 이는 불교적 자아 성찰과 윤회의 개념을 전자적 장치 속에 재현하는 동시에, 미디어 시대 인간의 자기 이미지 집착을 풍자하고 있기 때문이다. 〈TV 부처〉의 의미는 지금 더 선명해진다. 오늘날 우리는 스마트폰 화면 속 셀피와 영상으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응시한다. 불상이 모니터 속에 갇힌 모습은, 화면 앞에 머무는 우리 자신의 초상이다. 〈TV 부처〉는 단순한 아방가르드 실험이 아니라, 전 세계의 미술관에서 여전히 현재를 비추는 거울로 작용하고 있다. 

 

1984년 1월 1일, 백남준은 또 하나의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기획하고 실행하였는데 바로 위성 중계를 활용해 전 세계를 연결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 공연이다. 뉴욕, 파리, 서울을 오가며 전 세계에 생중계된 공연에서는 음악, 무용, 퍼포먼스 아트, 비디오 아트가 동시에 펼쳐졌다. 채널을 돌리듯 서로 다른 장르와 화면이 뒤섞이며 새로운 ‘멀티미디어 예술’의 형식을 구현했다. 당시 위성중계는 국가와 방송국의 영역이었으나, 백남준은 이를 예술의 장으로 끌어들였다. 국경과 시차를 초월한 라이브 예술을 실험한 것이다. 

 

대중매체의 권력적 구조를 예술적 놀이로 전환시킨, 백남준 특유의 글로벌 퍼포먼스이자 비디오 아트의 또다른 차원으로의 확장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여기에는 백남준 자신의 기술에 대한 낙관적 비전이 담겨 있었고, 혼성 장르의 새로운 무대가 작용하였으며 대중을 향해 열린 예술, 예술 민주화의 비전을 실험하는 장이기도 했다. 전 세계 도시를 실시간으로 연결한 최초의 예술 이벤트, 이는 오늘날 인터넷과 SNS, 글로벌 라이브 스트리밍 시대를 예견한 획기적인 실험이었다. 

 

백남준은 흔히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라 불린다. 그는 텔레비전이라는 기존의 매체를 해체하고, 낯설게 하고, 뒤집어 새로운 예술의 매체로 만들었다. TV는 더 이상 권력과 자본이 내려주는 한 방향적 신호가 아니라, 누구나 개입하고 조작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되었다. 존 케이지의 음악이 악보를 벗어날 수 있었듯이, 영상 또한 기존의 정해진 틀을 넘어 무한히 확장될 수 있음을 그는 증명했다. 이처럼 일상에서 너무나 익숙하게 존재하던 TV라는 매체를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완전히 새롭게 창안했다는데서 백남준의 탁월함을 발견할 수 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 위성중계 영상 스틸.

매체의 재창안 

현대미술 비평에서 핵심 주제 중 하나인 ‘매체’ 개념은 백남준이 활동을 시작할 무렵인 20세기 중반에 중요한 전환을 겪게 된다. 당시의 유력한 예술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형식주의 비평은 각 예술 장르가 자기 매체의 고유한 특성을 자율적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회화는 평면성과 색채, 조각은 물질성과 공간성에 집중할 때 비로소 순수성을 확보할 수 있으며 각 매체의 고유성과 순수성을 추구하는 것을 진정한 예술의 가치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후기 아방가르드 미술은 이러한 자기 규율적 태도를 급격히 해체했다. 매체가 더 이상 고정적이지 않고, 다양한 기술, 도구, 제도와의 교차 속에서 정의되는 불안정한 범주라는 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이 지점에서 ‘매체의 재창안’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크라우스에 따르면 매체는 본질적 속성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맥락과 예술가의 실험을 통해 지속적으로 변형되고 다시 정의된다. 즉 매체란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사용의 역사’와 ‘예술적 전략’에 의해 갱신되는 장이다. 따라서 비디오, 사진, 설치, 퍼포먼스 같은 새로운 형식들은 ‘회화 이후’라는 공백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매체 자체를 새롭게 발명하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백남준은 이러한 매체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선구적으로 보여준 예술가였다. 그는 기존 규율의 틀에서 벗어나 전자 신호와 텔레비전이라는 당시의 첨단 기술을 예술의 매체로 삼았다. 중요한 점은 그가 단순히 새로운 도구를 ‘추가’한 것이 아니라, 그 도구의 제도적 환경을 전폭적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했던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에서 그는 텔레비전 수상기를 조작하여 관람객이 익숙하게 보던 ‘방송 화면’을 추상적이고 실험적인 영상 신호로 바꾸어놓았다. 이는 TV라는 매체를 단순한 전달 장치에서 시각적 탐구의 장으로 재창안한 행위였다. <TV 부처>에서는 불상과 텔레비전 모니터를 마주 앉힘으로써 동서양의 정신문화, 매체와 신성성의 관계를 교차시켰다. 이 역시 텔레비전이라는 기술 매체를 단순한 기기의 수준에서 탈각시켜 철학적, 문화적 사유의 매개체로 재창안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크라우스가 말한 ‘재창안’은 매체를 특정 형식에 묶어두는 대신, 그것이 지닌 내부의 논리와 외부적 맥락의 긴장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정의하는 과정이다. 백남준의 경우, 전자 신호라는 기술적 물질성과, TV라는 대중매체, 그리고 예술의 제도적 문맥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매체적 장을 개척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글로벌 이벤트 <굿모닝 미스터 오웰> 또한 위성이라는 매체를 소통의 장으로 재창안한 사례다. 이때 인공위성은 더 이상 ‘통제와 통치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전 세계가 동시에 연결되는 경험 자체를 생산하는 장치가 되었다. 이는 크라우스의 매체 개념을 확장하는 동시에, 예술이 사회적·정치적 차원에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백남준의 작업을 통해 우리는 매체가 더 이상 고정된 본질을 지닌 범주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텔레비전과 전자 기술을 단순한 재료로 소비하지 않고, 그것의 재창안을 통해 철학적·미학적 탐구의 장으로 변형했다. 따라서 백남준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비디오 아트라는 특정 장르의 개척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매체 자체를 끊임없이 발명하고 재구성하여 예술의 역동성을 보여주려 했던 그의 예술가로서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인공지능이 그림을 그리고, 조각투자(NFT)가 작품을 매개하며,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이 전시 공간을 확장하며 매체의 복잡성이 전례없이 증가하고 있는 지금, 언제나 기술과 매체에 대해 새롭게 다가가고 실험했던 백남준의 태도야말로 오늘의 예술가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이 남는다. 이토록 자유롭고 획기적인 예술가 백남준의 정신과 태도가 가능할 수 있었던 조건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TV부처> 설치 전경(2025, 부산현대미술관).

예술가 백남준은 어떻게 가능했나 

백남준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에서 길러지지 않았다. 그는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도쿄대학에서 미학과 음악사를 공부했다. 이후 독일 뮌헨으로 유학하여 전후 독일의 전위적인 예술 환경을 접하게 되면서 전자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며 급진적인 실험 예술의 장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백남준은 곧 전위 예술가 집단인 플럭서스의 일원이 되었으며 미국 뉴욕과 독일을 오가며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펼쳐나갔다. 

 

이러한 백남준의 혁신적 태도는 단순히 ‘천재적 기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다층적 교육, 전후 아방가르드 환경, 철학·음악·기술의 융합, 그리고 국제적 네트워크라는 복합적 토양에서 자라났다. 존 케이지, 조지 마치우나스, 요제프 보이스 같은 동시대 전위 예술가들과의 교류가 그의 발판이었다. 이러한 조건들 속에서 예술가로 성장한 그는 전통과 제도, 기술과 권위,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과감히 해체하며, 예술이란 무엇보다도 ‘새로운 매체를 발명하고 그것을 놀이와 소통의 장으로 바꾸는 행위’임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가 만약 한국에서 계속 성장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소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당시의 한국 사회를 소환해보면 어렵지 않게 결과를 예상할 수 있다. 해방 전후의 한국은 백남준이 예술가로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환경이 거의 부재했다. 실험을 감당해줄 제도도, 실패를 지탱해줄 기반도 없었다. 우리는 한국인 백남준의 이름을 자랑스레 붙들지만, 정작 그를 길러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한국사회는 어떠한가?

작업실의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2023) 영상 스틸.

케이팝 너머 

현재 전 세계 음반차트를 휩쓸고 있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사례를 보듯 케이팝은 이미 세계적 문화 브렌드가 되어 K-컬처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특히 한국 특유의 연습생 제도와 기획사의 철저한 시스템,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전략은 탁월한 효율성을 보여준다. 무대 위의 아이돌은 완성도 높은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그 자체로 한국의 문화 역량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 체계는 동시에 예술가를 ‘관리’하는 구조다. 개인의 돌발적 실험과 실패를 허용하기보다는, 시장성과 성공 공식을 우선한다. 

 

반면 백남준이 성장한 조건은 정반대였다. 그는 도쿄와 독일, 미국을 오가며 음악·철학·기술을 넘나드는 학제적 경험을 쌓았다. 존 케이지를 비롯한 플럭서스 예술가들과의 교류 속에서 그는 기존 규율을 깨뜨리는 법을 배웠다. 실패와 돌발적 실험이 오히려 환영받는 현장이 그의 창의성을 길러낸 토양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의 문화 시스템이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그 안에서 백남준 같은 급진적 예술가가 성장하기는 쉽지 않다. 산업적 성공에 최적화된 시스템과, 자유로운 실험을 허용하는 예술 생태계는 본질적으로 다른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지난 8월에 백남준아트센터에서 <48시간 음미체학교>가 열렸다. 48시간 동안 음악, 미디어 연구, 신체 활동을 함께 경험하고 배우는 새로운 형태의 실험이었다. 1965년 독일의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백남준을 비롯하여 각자의 퍼포먼스를 24시간 지속하며 함께 밤을 세웠던 8명의 플럭서스 작가처럼, 시간, 연대, 수행이라는 새로운 물질성을 나누고자 했다. 3일 동안 밤낮으로 퍼포먼스, 음악회, 미디어 워크샵, 신체 활동, 심포지엄 등 다양한 이벤트들이 이어지는 동안 한 사람의 참여자였던 나는 낯선 소리와 어색한 몸짓을 통해 미흡하게나마 새로운 변화에 대한 가능성을 느낄 수 있었다. 

 

케이팝 시스템을 부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다만 그 옆에, 비상업적 예술을 지원하고 실패를 장려하는 제도가 더 활성화되어야 한다. 예술가가 학문과 과학, 철학을 넘나들며 실험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될 때, 우리는 제2의 백남준을 기대할 수 있다. 케이팝이 세계 대중문화를 향한 ‘효율의 언어’라면, 백남준은 세계를 흔드는 ‘파격의 언어’이다. 한국 문화가 두 언어를 동시에 말할 수 있을 때, 더 풍성한 미래가 열린다.

 


 

  1. 글의 제목은 2024년 11월 30일부터 2025년 3월 16일까지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전시 <백남준, 백남준 그리고 백남준>에서 가지고 왔다. 전시 제목은 백남준의 작업을 초기, 중기, 말기 등 3부로 구분하여 전시를 구성한데서 유래하였지만, 이 글은 과거에 실존했던 백남준, 현재에도 유효한 백남준의 동시대성 그리고 미래에 탄생할 새로운 백남준에 대한 세가지 관점의 백남준을 조망하고자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