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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철학자순례] 은유는 새로운 실재를 창조하는가

by 웹진수이제 2026. 2. 11.

 

은유는 새로운 실재를 창조하는가 

 

김영환 (수이제)

 

무시당하던 은유 

『삶으로서의 은유』는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와 철학자 마크 존슨의 저서로서 전통적 언어학과 철학에 대하여 도전하며 참, 의미, 이해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책이다. 예로부터 은유는 철학에서 부차적인 주제로 다루어졌고 20세기 논리실증주의에서는 은유에 대한 적대감이 엄청나게 컸다. 그러나 오늘날 은유는 사람이 새롭게 세계를 보는 관점으로 버릴 수 없는 인지의 장치로 보고 있다. 자연 ‘법칙(률)’, 자연 ‘선택’이란 개념도 이미 은유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은유는 효과적인 전달을 위한 언어적 장치에 그치지 않는다. 흔히 은유를 시나 문학에서만 사용되는 표현을 꾸미는 기교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레이코프와 존슨은 은유가 우리의 사고방식과 경험, 행동 방식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인지 구조이며 틀이라고 주장한다. 

 

은유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갈래는 개념적 은유이다. 이는 추상적인 개념을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개념을 통해 이해하는 방식을 말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사고 방식이나 언어에서 나타나는 은유적 표현. 이는 어떤 추상적인 개념을 더 이해하기 쉽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익숙한 경험이나 물리적 세계의 개념을 빌려서 표현하는 방식이다. 

 

‘시간이 간다’ 혹은 ‘시간을 잃었다’라는 표현에서 시간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공간적인 이‘동(예: 길을 가는 것)으로 비유한 개념적 은유이다. ‘생각을 잠그다’는 표현에서 ‘잠금'은 사고를 제어하는 물리적인 행위로, 사고라는 추상적인 활동을 특정 물리적 행위로 비유한다. 

 

개념적 은유는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조직하는지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특정 문화나 사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시간은 돈이란 은유는 매우 자본주의적안 사회에서만 큰 호소력을 갖는다. 

 

이러한 은유 개념과 철학적 문제의 성격도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철학의 추상적 개념들은 그 기원에서 감각적 구체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성을 뜻하는 라틴말 ‘ratio’는 계산하다란 뜻을 갖고 있었고, 질료를 뜻하는 그리스말 ‘hyle는 목재란 뜻을 갖고 있었다. 개념을 뜻하는 독일어 ‘Begriff’는 손으로 잡다는 뜻에서 출발하였다. 죄나 책임을 뜻하는 독일어 ‘Schuld’는 본디 빚, 채무를 뜻하였다.

 

데리다는 이렇게 감각적인 낱말에서 점차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개념으로 의미가 늘어난 철학사를 해체하려 든다. 이런 변화는 오래되어 겉이 닳아버린 주화가 비싼 골동품으로 통용되는 것과 같다. 또는 희미하게 빛이 바랜 흰색 신화라고 보기도 했다. 철학이 쉬운 것을 어렵게 말하는 기술이라고 얕보는 말도 이런 면에서 보면 나름대로 까닭이 있어 보인다. 20세기 위대한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문제란 형이상학적 개념을 나날말의 쓰임새로 되돌려놓으면 그냥 사라진다고 보았다. 이 두 사람에게는 공통성이 많아 보인다. 특히 한자말 투성이 철학 용어들은 두겹 소외를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변증법에서 쓰는 독일어 ‘aufeben’는 독일어에서 그냥 들어올리다는 뜻이다. 이것을 ‘지양(止揚)’으로 옮기고 깊은 뜻을 갖고 있다고 여긴다. 본디 고향에서는 나날의 평범한 낱말이 철학 용어로 된 것이었다. 이 철학용어는 우리말에서 낯설고 삶에서 먼 한자어로 이해된다. 그냥 ‘들어올리다’로 옮기면 될 것을 ‘지양’이라는 어려운 말로 바꾸었다. 거기에 무슨 신비한 뜻이라도 있는 양 여긴다. 

 

조지 레이코프 // 마크 존슨

은유 - 현실을 만드는 창조 

은유가 단순히 현실을 반영하는 것을 넘어, 현실을 구성하고 만들어 낸다고 레이코프와 존슨은 주장한다. 은유가 달라지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행동 방식도 달라진다. ‘논쟁은 전쟁이다’라는 은유 대신 ‘논쟁은 춤이다’라는 은유를 사용한다면, 논쟁은 싸움이 아닌 함께 만들어가는 조화로운 과정으로 인식될 수 있다. 은유를 의식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사고방식과 행동에 대한 통찰력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 지은이들은 이렇게 은유가 창조한 현실을 실재한다고 본다. 그러나 또다른 관점에서 보면 현실을 보는 눈이 은유로 한쪽에 갇히는 게 아닐까? 은유가 현실의 어떤 면을 부각시키거나 가리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본다. 그럼에도 지은이들은 체험주의적 관점에서 은유가 창조한 현실을 실재한다고 보고 있다. 이런 주장은 논란거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실재론을 좀 더 유연하게 해석해야 이해될 것 같다.

객관주의적 이해와 주관주의적 이해 

은유를 이해하는 관점으로는 전통적으로 크게 객관주의적 관점과 주관주의적 관점이 있다. 객관주의 신화에서 참은 외부 세계에 독립적으로 있으며, 마음과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파악된다. 이는 실재론적 진리 개념인데 우리는 참에 끝없이 접근할 뿐 도달하지는 못한다고 보며 초월적 참(진리) 개념이다. 객관주의에서 언어는 중립적이며 객관적 세계를 투명하게 그대로 반영한다. 비신체적 이성으로 참을 인식하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전통에서 은유는 의미 이행와 진리 해명에 관심사였다. 그러나 은유는 우리의 언어와 개념체계에도 넓게 걸쳐 있는 현상이다. 의사소통을 설명하지 못한다. 

 

주관주의는 의미와 참이 개인의 주관적 경험과 감정에 의해 완전히 결정된다고 믿는다. 언어의 의미가 철저히 개인적이고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실재에 관한 모든 법칙적 설명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의미는 개인적 느낌, 경험, 가치의 문제이고 순수하게 전체론적 문제이다. 사람의 이해를 떠난 진리의 문제는 없다. 객관성은 추상적이고 비개인적인 것을 선호하기에 비인간적일 수 있다. 과학은 삶의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무관하다. 의미는 전적으로 사적이며 자연적인 것이 아니며 진리의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다. 

 

신화를 깨뜨리는 체험주의 

체험주의는 이제까지의 이런 주장들에 대해 비판적이다. 앎이란 몸(신체 경험)에 기반하며, 객관적 실재를 완전히 독립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고 본다. 개념적 은유는 사고가 감각적 신체적 경험을 기반으로 형성된다. 이때 상상력이 작동하며 인간의 사고가 순수하게 객관적이거나 주관적이지 않다. 삶 속에서 체험한 감각적·행동적 패턴으로 우리의 일상적 의례에서 볼 수 있다. 이런 체험적 게슈탈트가 은유의 토대가 된다. 감각적 체험을 추상적인 개념으로 만드는 힘이 곧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은유를 가능케 하는 힘이고 은유는 상상적 합리성의 문제이다. 

인지 심리학에서는전통 철학에서 무시당했던 상상력이 인지의 핵심 요소라 본다. 상상력이 단순히 예술이나 창의성에 국한되지 않고 일상적인 사고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본다. 상상력을 복원한다. 상상력은 특히 개념적 은유와 체화된 인지 개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구체적인 경험(신체적 경험 포함)에 의존하며, 이 과정에서 상상력이 작동한다. 상상력은 단순히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신체 경험과 감각을 통해 구체화한다. 

오리인가. 토끼인가. 출처: https://blog.naver.com/smilespeech2/

 

‘무언가가 위에 있다’는 개념이 ‘행복, 좋음, 상승, 성공’과 연결되는 까닭은 신체적 경험, 서 있는 게 누워있는 것보다, 또는 넘어진 것보다, 물에 빠진 것보다. 우위에 있다는 감각을 통해 상상력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범주화(사물의 분류)는 논리 규칙이 아니라 상상력에 기반한 원형을 통해 사물을 분류하고 이해한다. 이를테면, ‘새’라고 하면 펭귄보다 참새를 먼저 떠올리는 것처럼, 참새와 닮은 것을 찾아 범주화하는 데도 상상력은 영향을 끼친다.

 

은유는 언어가 중립적이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언어는 단순히 사물의 이름을 붙이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시간은 돈이다’ 같은 은유는 시간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경제적 가치라는 틀로 바라본다. 이처럼 은유는 우리가 어떤 개념을 특정 방식으로 인식하고 경험하게 하는 틀을 설정한다. 

 

은유가 사고의 본질적 부분이며 언어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은 불가능하다. 은유는 언어와 사고가 특정한 방식으로 형성되고 해석됨을 보여준다. 의미와 진리에 대한 객관주의적 신화의 한계를 보여준다. 반면에 주관주의 신화는 현실이 개인의 주관적 경험에 따라 완전히 상대적, 의미와 진실은 전적으로 개인의 마음속에서만 형성되며, 외부 현실과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주관주의가 옳다면, 각 개인의 경험과 의미가 완전히 고유하므로, 서로 간의 소통이 불가능하다. 현실에서는 사람들은 언어를 통해 개념을 공유하고 상호작용한다. 이는 언어가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공유된 구조를 가진다는 증거이다. 이는 경험의 공동 기반이 된다. 인지와 언어는 몸과 감각을 통해 형성되며,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의미가 공유된다. 

 

은유는 우리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체험주의적 접근은 진리와 의미를 주관적인 경험이나 체험을 통해 이해한다. 즉, 어떤 사실이나 참(진리), 의미가 개인적인 경험이나 감각적 체험에 기반하여 형성된다. 체험주의적 접근에서는 진리가 객관적 사실이나 이성적 분석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지식이 외부 세계를 객관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통해 인식되는 과정에서 감각적 실재와 연결된다. 감각적인 경험이나 정서적 경험이 중요한 진리의 원천이다. 이는 사람들이 세상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영향을 준다. 

 

색의 경험에서 색깔의 진리 또한 개인의 감각적 체험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빨간색은 어떤 사람에게는 자극적이고 강렬한 색으로 느껴지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따뜻하고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감각적 체험은 각자의 심리적,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으며, 진리는 그 개인적인 경험에 뿌리를 둔다. 체험주의적 의미는 세상에서는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고 느끼는지와 관련된다. 개인적 경험을 통해 생성된 해석으로, 의미가 객관적인 사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체험과 감정적 반응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 상황, 문화적 배경 등에도 영향을 받는다. 경험에 의해 재구성된다. 의미는 일정한 규칙이나 논리적인 추론을 통해 고정되지 않으며 불변적이지 않다. 

 

체험적 게슈탈트는 몸을 통해 지각하는 구조화하는 전체적 패턴이다. ‘길’의 체험적 패턴은 ‘시작→경로→목적지’라는 구조를 갖는다. 의미를 더 구체적이고 알기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상상력. 출처: https://kr.lovepik.com

 

진리와 의미에 대한 새로운 이해 

체험주의적 진리와 의미는 경험을 통해 하나의 진리나 의미가 여러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따라서 진리와 의미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경험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그 해석은 각자의 삶의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감정이나 경험을 인지적이고 감정적으로 재구성한다. 사람들은 단편적인 정보가 아닌 전체적인 경험을 인식하고 해석한다고 주장한다. 체험적 게슈탈트는 경험, 사물이나 사건의 전체적인 모습을 인식함을 보여준다. 은유는 체험적 게슈탈트의 구조를 추상 영역으로 던지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게슈탈트는 물리적인 면에서는 같으나 보는 사람에 따라, 배경 지식과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 즉 주관적 의미와 해석된 객관적 실재의 만남이다.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은유를 체험주의적 실재론으로 인정할 수 있다면 완화된 실재론으로 해석될 수 있어야 하리라 본다.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면서 지식의 객관성을 긍정하고 의미와 진리의 주관성을 인정하면서도 상상력의 체험적 제약을 인정하는 게 은유에 대한 체험주의적 종합이라 할 수 있다. 

 

은유를 통한 언어의 의미와 진리에 대한 전통적 언어학과 철학에 대한 지은이들의 도전은 참신하다. 상상력, 의미, 이행에 관한 견해에서도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체험주의적 은유 이해와 객관주의적 은유 해석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지 좀 더 생각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우리말과 영어 사이의 은유 차이를 좀더 조사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 지은이들은 오랫동안 주류 철학의 관심 밖에 놓였던 은유 개념의 연구에서 전통 철학의 마음/몸(→신체화된 인지), 이성/감성,(→상상력), 진리 실재론/상대주의의 이분법에 대해 비판적인 결론을 냈지만, 비트겐슈타인이나 데리다처럼 은유론을 통하여 반철학, 철학의 해체에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은유(metaphor)와 형이상학(metaphysics)의 말밑(어원)의 실질적 동일성(메타meta-넘는다, 위)은 이 둘의 관계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많이 남기는 듯하다. 은유의 성격에 대한 논의는 철학적 문제의 성격에 대해서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진리와 의미는 주어져 있지도 않고, 마음속에서 제멋대로 창조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신체적 경험과 은유적 사유를 통해 구성하는 사회적 체험적 산물이다. 은유는 곧 실존과 사유의 방식 자체를 드러내는 창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