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연주할 협주곡을 기다리며― <씨스피라시>(2021)와 하이데거와의 연결점
황송이 (문화사랑백년어)
사무실 컴퓨터 배경 화면에 화려한 색채의 물고기가 떠 있다. 화면을 응시하는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다. 그 눈빛에는 웃음이 없다. 마치 묵언 수행이라도 하는 분위기다. 갑자기 예전에 즐겨 듣던 <바다의 협주곡>이 떠오른다. 기대 이상으로 이 곡은 힘이 있다. 표현을 품은 감정선을 느끼며 끝없이 나아갈 수 있다는 설렘이 생긴다. 그러다 나는 다시 물고기의 표정을 보면서 알 수 없는 죄책감에 빠진다.
바다는 스스로 연주할 어떤 협주곡을 만들고 싶어할 것이다. 인간이 주체가 아닌, 해양 생태계가 서로를 향해 건네는 소리와 리듬으로 이루어진 협주곡 말이다. 그러나 그 소리를 기대하기 전에 우리는 기존에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바다가 과연 바다의 본래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지를 말이다.
바다의 거대한 음모를 응시하다
<씨스피라시>는 이 질문을 깊게 파고 들게 만든다. 이 영화는 위기에 처한 해양 생태계에 관한 다큐멘터리이다. 주요 내용은 바다에서 이루어지는 어업이 해양 생태계에 위기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씨스피라시’는 ‘바다(sea)’와 ‘음모(conspiracy)’를 합성한 신조어이다. 제목 그대로 이 다큐멘터리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바다에 얽힌 거대한 음모’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이 영화는 환경 운동가인 킵 앤더슨에 의해 제작되었다. 그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도 활동한다. 주요 작품으로는 <몸을 죽이는 자본의 밥상>이 있다. 그는 공장 형태로 운영되는 축산업이 환경과 천연자원을 파괴한다는 내용인 <카우스피라시>라는 다큐도 제작하였다. <씨스피라시>는 <카우스피라시>의 후속작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공동제작자이자 감독인 알리 타브리지는 계속 바다를 사랑해 왔다. 바다는 그에게 꿈과 용기를 주는 원천이었다.
그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어 바다에 관한 영화를 완성한다. 또한 이 영화의 해설자로도 등장한다. 영화 제작과정에서 그가 마주한 바다에 관한 진실은 충격적이었다. 영화 도입의 첫 내용은 누구나 동감할만한 해양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던 플라스틱 쓰레기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어업 쓰레기가 등장한다. 소비자가 알지 못하는 뜻밖의 진실이 계속 다가온다.
부수어획으로 살해되는 돌고래와 상어
알리는 어린 시절부터 동경하며 사랑한 바다가 현재 위기 상황임을 실감한다. 그 실상을 공개하고자 장면 곳곳에 위기의 흔적을 남긴다. 실제로 그는 일본의 어느 만에서 어부들이 돌고래를 마구잡이로 죽이는 장면을 목격한다. 경찰들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그냥 넘어간다. 현장을 들킨 어부들은 더 많은 물고기를 획득하기 위해 돌고래를 죽인다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실상은 참다랑어를 더 많이 잡기 위해 그곳에 함께 서식하는 돌고래들을 죽인 것이다.

다른 장면에서는 중국요리로 인기가 높은 샥스핀 수요 때문에 상어가 희생된다. 기업형 어업을 하는 자들은 살아있는 상어의 지느러미만 자른다. 바다 물결에 상어 피가 섞이며 ‘피바다’가 된다. 이렇듯 대부분의 상어는 지느러미만 잘리고 몸통은 바다에 버려진다. 알리는 이를 ‘샤크 피닝’, 즉 상어지느러미 절단 방식이라 설명한다. <씨스피라시>는 여러 증언을 통해 인간은 한 해에 시간당 1만 1천에서 3만 마리 상어를 죽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더 충격적인 것은, 어획 과정에서 죽는 상어의 절반은 부수어획이라는 점이다. 부수어획은 목표 종의 어획 과정에서 그물에 걸린 다른 종류의 물고기다. 매체에서 어업 장면을 볼 때 우리는 거대한 그물을 넓게 던져 한꺼번에 물고기를 낚아 올리는 모습을 본다. 인간이 목표한 물고기만 그물에 걸려 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종의 물고기가 올라온다. 이를 부수어획이라 한다. 이렇게 올라오는 물고기는 이미 죽어 있는 상태다. 함께 올라온 상어도 거의 죽어 있다. 이런 어망에 걸려 죽는 상어가 일 년에 무려 5천만 마리라고 한다. 믿어지지 않는 수치다. 공연히 사체가 된 상어들은 인간에게 불필요한 것, 즉 ‘쓰레기’이므로 바다에 다시 버려진다.
이런 불법 어업을 근절할 해결방법은 미미하다. 기업형 어선이 460만 척이나 되는데 감시할 권한이 있는 기관은 보이지 않는다. 어선의 노동자들은 사실상 노예 신세이다. 무법천지의 배 위에서는 그들의 인권을 주장하거나 항변할 방법이 없다. 불법 어업을 감시하기 위해 참관인을 보내기도 했다. 자본의 탐욕 속에서 우리는 그 참관인이 희생당하리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불과 5년 사이 파푸아뉴기니의 참관인들 중 18명이 실종되었고 다른 이들은 살해 협박을 받기도 했으며, 노동자들은 배로부터 해방될 희망을 찾지 못한다. 결국 우울증과 자살 시도가 빈번해진다. 계속 장면을 보는 내내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진다.
해양 생태계 파괴의 중심엔 거대한 산업구조
어업으로 인해 생기는 해양 쓰레기도 심각한 수준이다. 알리 감독은 인간들이 생선을 먹는 것과 지속적인 어업이 해양 생태계 파괴의 주된 이유라 주장한다. 많은 환경 단체들은 어업이 환경 파괴의 원임임을 언급하지 않는다. 어업 관련 거대 기업들과 이익단체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속 가능한 어업’이라는 인증 제도가 탐욕이 품은 이해관계 속에서 실효성이 없음을 보여준다.
침묵이 배신이 되는 순간이 온다.
–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연설 중에서
이렇듯 해양 생태계 파괴의 중심에는 거대한 산업구조가 있고 인간의 자본주의적 탐욕이 해양 생태계를 파괴한다. 그 파괴의 주된 수단이 어업이라고 이 다큐멘터리를 고발한다. 특히 ‘지속 가능한 어업’이라는 개념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그러나 <씨스피라시>는 지지를 받는 동시에 곳곳에서 강한 비판을 받았다. 통계가 맞는 수치인지, 민감한 장면에 악의적 편집을 한 것은 아닌지, 한쪽 면만 옳고 다른 측면의 사정을 심도있게 탐색했는지 등 여러 반론이 제기되었다.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는 본질적으로 현실을 재구성하는 예술이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카메라는 장면을 선택하고, 찍은 사진은 편집을 통해 재구성된다. 우리가 본 장면이 진실에 가까운지에 대한 질문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이데거, 다큐의 미학으로 드러나는 존재의 진리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진리를 단순한 사실의 정확성이 아니라 ‘드러남’으로 이해했다. 어떤 것이 드러난다는 것은 동시에 다른 것이 가려진다는 뜻이다. 세계는 언제나 특정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세계를 향한 완전한 중립적인 시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씨스피라시>의 바다는 새로운 현상으로의 면모를 드러낸다. 바다는 영화 속에서 산업을 위한 ‘돈벌이 수단’으로 전환된다. 돈으로 환산되는 가치만이 바다의 본질이 된다. 이는 하이데거가 비판한 현대 기술 문명의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 그는 기술적 사유가 세계를 ‘자원’으로 파악한다고 보았다.

또한 영화는 자본이 바다를 수단으로 여긴다고 비판하지만, 데이터 수치와 자극적인 장면이 또 다른 방식의 ‘자원화’를 수행하는 것은 아닌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고통의 이미지는 강력하다. 피로 물든 바다, 그물에 걸린 생명, 도살 장면의 반복은 관객의 감정을 압도한다. 보는 동안은 냉정함과 이성적인 판단은 잠시 보류된다. 그럼에도 항상 드러내는 모습 이면에 감추어진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 내 존재에게 던져진, 붉은 색소를 칠한 연어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제기한 문제를 가볍게 넘길 수는 없다. 유령 어구로 인한 생태계 파괴, 불법·비보고·비규제(IUU) 어업의 확산, 혼획으로 인한 대량 희생, 해상 노동자들의 인권 침해는 우리가 직면하는 위기이다. 특히 우리가 일상적으로 섭취하는 생선이 어떠한 생산 과정을 거쳐 오는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때 나는 연어를 즐겨 먹었다. 건강에 좋다는 오메가-3의 효능을 믿으며 붉은색의 영양소를 믿었다. 그러나 영국 바다에서 잡아 올린 연어의 사체에 붉은 식용색소를 입힌 것을 우리는 소비한다. 그 장면에서 연어 애호가들은 다시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메가-3의 원천이 사실은 바다의 미세조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선은 단지 그 조류를 섭취한 후 영양소 흡수율을 좋게 만들 뿐이다. 인간은 그 생선을 섭취하지만 생선에 들어있는 수은과 오염물질도 함께 섭취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내-존재’라 불렀다. 우리는 세계를 바깥에서 관찰하는 주체가 아니라, 이미 그 안에 던져진 존재다. 우리가 살기 위해 주어진 현실적인 것은 은폐된 채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미디어 환경 또한 우리의 인식을 규정한다. 자극적 이미지와 단정적 문장은 빠르게 확산되고, 복잡한 설명과 신중한 판단은 관심을 얻기 어렵다. 사람들은 정확성보다 확실성을 원한다. 그러나 확실성은 때로 사고를 멈추게 한다. 환경 다큐멘터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도, 반대로 전면 부정하는 것도 그런 예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우리가 실증적으로 특정의 현실적인 것, 실제적인 것, 살아있는 것, 실존하는 것, 존립적인 것 등과 행동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현실성, 실제성, 살아있음, 존립성 등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간절히 바다의 협주곡을 기대하며
오늘의 바다는 평온하다. 때로는 센 파도 소리를 내며 자신의 아픈 현실을 감춘다. 나는 바다가 주체적으로 협주곡을 연주하며 인간에게 선율을 전달하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 바다가 현실의 고통을 우리에게 표현하지 않는다고, 침묵한다고 만만하게 대할 수 없다. 어떤 존재이든지 조용하고 배려심이 많을수록 헤아림으로 반응해야 한다.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해양생태계가 인간의 탐욕을 충족시켜 줄 수단이어서는 안 되며, 이를 간과하면 그 결과는 인류의 고통으로 환원되어 나타날 것이다. 만약 그날이 오면, 바다는 우리를 절대로 이해해 주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간절히 바다의 협주곡을 기대하며 그 곡이 작품으로 남겨지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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