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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집중 탐구

[작가 집중 탐구] 낙동강에서 한강을 읽다

by 웹진수이제 2026. 2. 11.

 

낙동강에서 한강을 읽다

- 식물의 언어로 듣는 한강의 문학

 

권두현 (동아대) 

 

 

『검은 사슴』: 빛이라는 언어, 신체라는 매체 

‘막장’은 탄광의 가장 깊은 끝, 빛과 숨, 방향 감각이 사라지는 심연이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살아있음의 감각이 가장 강렬하게 솟구친다. 한강의 첫 장편소설 『검은 사슴』은 이 심연에서 출발한다. 삶의 표면에서 추방된 인물들은 갱도의 끝으로 밀려 들어가며, 어둠 속에서 사라진 숨결과 무너진 몸의 감각이 다시 깨어난다. 

 

실종된 동료 의선을 좇아 인영과 명윤이 폐광촌 ‘황곡시’로 향하는 여정은 존재를 ‘느껴낸다’는 의미로 변모한다. 의선은 말이 적고 접촉을 피하며, 육식을 거부한다. “짐승이 죽는 대가로 내가 오래 살아야 할 이유도, 자격도 없다”는 고백은 동정심을 넘어 식물-동물-인간의 위계를 해체하는 사유다. 의선은 인간보다 빛에 먼저 반응하는 몸, 광합성하는 생명체로서 자신을 느낀다. 명윤의 회상처럼, “어두운 방에서도 창문을 향해 앉아 있는” 그는 가냘픈 빛을 향해 기울어지는 화분의 풀과 같다. 

 

황곡시는 이미 무너졌으나 웅크린 채 버티는 “산 채로 버림받은 짐승” 같다. 폐광촌의 사진작가 장종욱은 그 어둠을 광원으로 포착하며 죽음의 미학을 기록하는 재현의 주체다. 반면 의선은 빛에 감응하며 존재를 드러내는 식물적 매체다. 그의 몸은 말하거나 이미지를 고정하기보다 타자의 고통과 빛의 떨림에 반응하고 그것을 통과시킨다. 전자가 재현의 주체라면 후자는 정동의 장치다. 그의 몸은 말하거나 이미지를 남기기보다 타자의 고통과 빛에 반응하며 그것을 매개한다. 

 

 

‘검은 사슴’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빛에 반응하는 상처 입은 존재, 식물성과 동물성이 교차하는 경계 위의 형상이다. 이 경계에서 생명 간 위계는 무너지고, 빛을 매개로 정동하는 신체만이 남는다. 『검은 사슴』은 부재한 존재가 어떻게 감각의 여운으로 남아 다른 몸을 뒤흔드는지, 그리고 신체가 어떻게 정동의 매체가 되는지를 묻는다. 고요는 비어 있지 않다. 그것은 정동이 번역되고 유영하는 밀도의 장이며, 빛은 생명의 방향을 기울이는 파장으로 작동한다.

 

『채식주의자』: 생기성의 정동적 전이 

한강의 소설에서 여성의 몸은 전통적 재현 체계 속에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정동을 흘려보내 다른 몸의 결을 바꾸는 매개이자 서사를 흔드는 힘이다. 『검은 사슴』의 의선이 빛을 좇아 기울던 식물적 신체였다면, 『채식주의자』의 영혜는 더 이상 인간의 언어가 붙잡을 수 없는 경계로 나아간다. 

 

이 작품은 채식주의 이념에 대한 옹호담이 아니라, 정동의 전이를 그린 변신의 서사다. 꿈속에서 피와 폭력의 이미지에 압도된 영혜는 고기를 끊고, 말과 움직임, 먹기와 사회적 역할을 하나씩 거부하며 ‘사람-되기’를 멈춘다. 그는 인간·동물·식물 간 위계를 해체하며 식물에 가까운 존재로 이행한다. 

 

이때 중요한 개념이 ‘생기성’이다. 말하는 인간, 울부짖는 동물, 움직이지 않는 식물이라는 위계화된 생기성을 『채식주의자』는 거부한다. 나아가 영혜의 변화는 특정 종이나 형태에 고정되지 않는 전이적 생기성의 서사다. 그는 인간·동물·식물 사이를 정동적으로 전이하며 신체가 생동하는 힘의 통로가 되는 과정을 살아낸다. 

 

소설 속 영혜의 몸은 반복적으로 시각적 이미지로 붙들리지만, 그것들은 전통적 여성 재현의 질서를 파열한다. 반라로 거리에 앉아 있던 모습, 물감을 칠한 피부, 물구나무선 표정은 욕망과 규범의 틀을 이탈한다. 영혜는 신체를 빛·물·수액과 함께 흘려보내며 ‘인간’이라는 장르를 벗어난다. 

 

그의 감수성은 환경을 외부 대상이 아니라 신체와 얽힌 물질계로 경험하게 한다. 옷을 벗는 것은 부끄러움의 소멸이 아니라 피부라는 경계를 넘어서는 시도이며, 물구나무는 세계 전복이 아니라 땅을 받아들이는 또 다른 자세다. 영혜는 인간의 윤리가 아니라 식물의 역량을 발현하며, 경이롭고 기이한 변화를 통과한다.

 

이것이 생기성 위계의 전복에 따른 생기성의 정동적 전이다. 전이의 도상에서 이미지와 신체, 언어와 침묵, 자연과 사회의 경계가 붕괴한다. 한강 문학의 ‘말하지 않는’ 존재는 병리가 아니라 다른 언어를 구성하는 주체다. 영혜가 ‘나무-되기’를 택하는 여정은 이후 『희랍어 시간』에서 더 급진적인 비인간적 시간성으로 확장된다.

 

『희랍어 시간』: 침묵의 친밀성과 정동적 커뮤니케이션 

“말이라는 게 원래 구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검은 사슴』의 이 문장은 『희랍어 시간』에서 보다 급진적인 방식으로 변주된다. 『채식주의자』가 먹는 입의 침묵이었다면, 이 작품은 말하는 입, 그리고 끝내 말을 멈춘 입을 다룬다. 언어의 가능성과 한계, 그리고 언어를 초과하는 정동적 지속이 이중 독백의 구조 속에서 탐색된다. 

 

남성 화자는 시력을 잃어 가며 서서히 관념의 심연으로 가라앉고, 여성 화자는 두 차례 실어증을 통과하며 언어 이전의 어둠을 향해 나아간다. 평행선처럼 만나지 않는 두 존재에게 언어는 장벽이지만, 침묵은 의외의 연결이 된다. 남성은 실명의 그림자 속에서 죽은 언어인 희랍어의 완결성과 고요에 끌리고, 여성은 모국어의 폭력성을 거슬러 말하지 않는 상태를 더 진실하게 받아들인다. 

 

그의 실어증은 병리가 아니라 의미를 틀 지우는 언어의 존재론적 폭력에 대한 거부다. 그래서 그가 죽은 언어인 희랍어를 배우려는 것도, 말을 되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언어가 붙잡지 못하는 감각의 지대를 몸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에게 희랍어는 말이 되기 전과 침묵에 잠긴 뒤의 경계를 오가게 하는 언어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사건은 대화가 아니라, 말을 멈춘 자리에 생겨나는 다른 감각적 접속이다. 손바닥에 글씨를 써주는 행위, 함께 머무는 침묵은 언어 이전 혹은 언어 너머에서 성립하는 교류를 보여준다. 『채식주의자』에서 생기성의 정동적 전이가 신체를 인간 언어의 층위 밖으로 이동시켰다면, 『희랍어 시간』에서는 언어 자체가 정지된 자리에서 ‘인간-너머’의 소통 조건이 드러난다. 

 

결국 이 작품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말을 거부하면서도 타자와 세계에 닿을 수 있을까? 한강은 “가능하다”고 답한다. 그것은 인간 중심의 언어가 아니라 정동의 언어이자 식물의 언어로서 가능하다. 『검은 사슴』이 빛에 기울어 타자의 흔적을 품는 몸의 이야기였다면, 『희랍어 시간』은 소리를 멈춘 채 말과 청각을 통과하지 않고도 세계와 교섭하는 몸의 이야기다.

 

식물기술학으로서의 한강 문학 

우리가 읽는 책은 한때 숲을 이루고 바람과 빛을 품으며 생기를 키워 온 나무였다. 그 나무는 베어져 종이로 가공되고, 그 위에 문자가 새겨졌다. 책은 나무의 부재를 증언하는 동시에 독자의 감각 속에서 다시 발아할 가능성을 품는다. 이 잘림과 새김, 전환과 재생의 과정을 매개하는 글쓰기가 바로 ‘파이토그라피’, 즉 식물기술학이다. 

 

식물기술학은 식물을 단순히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과 변화의 리듬, 생기성과 관계의 흔적을 기록하는 미학적 실천이다. 한강의 문학은 종종 이 식물적 글쓰기의 시도로 이루어진다. 『검은 사슴』에서 빛에 기울어지는 의선의 신체, 『채식주의자』에서 인간-동물-식물의 위계를 무너뜨리는 영혜의 전이, 『희랍어 시간』에서 말을 멈춘 존재가 언어 이전의 정동으로 살아가는 방식-이들은 모두 식물의 언어로 쓰인 서사다. 

이 신체들은 말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며, 빛과 고통, 타자의 흔들림에 반응한다. 식물기술학은 이러한 비인간적 리듬과 감각을 드러내는 글쓰기다. 숲이 뿌리와 수액, 향과 색으로 소통하듯, 한강의 글쓰기도 소리 없는 교환과 경계 없는 흘러듦을 전략으로 삼는다. 

 

여기서 생기성 개념이 다시 중요해진다. 생기성은 살아있음의 정도, 살아있다는 느낌의 강도를 규정하는 사회적 위계이지만, 한강의 문학은 이를 교란하며 누가 말하고, 누가 말하지 않음으로 정동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나아가 개체에 부여된 생기성의 감각이 인간-식물-동물-사물 사이를 이동하며 전이되는 과정이 전면에 등장한다. 

카럴 두잉의 파이토그라피 작업(출처: https://kareldoing.net/).

 

식물기술학은 이 생기성의 전이적 실천이다. 나무에서 종이로, 종이에서 글로, 글에서 독자의 감각으로 이어지는 전이 속에서 작가는 생기성의 흐름을 매개하고 독자는 텍스트 속에서 다시 나무의 숨을 읽는다. 쓰기와 읽기 모두가 전이의 행위이며, 언어를 초과하는 정동의 흔들림 속에서 관계가 새롭게 형성된다. 이것이야말로 한강 문학이 열어 보이는 식물기술학의 지평이다.

 

낙동강에서 한강을 읽는다는 것 

낙동강 하구의 서부산은 난개발과 재편의 굴곡 속에서 생태와 기억이 지워진 공간이다. 을숙도는 한때 동양 최고의 철새 도래지였으나 산업화 시기 쓰레기 매립장과 분뇨 처리장이 들어섰고, 지금은 생태공원과 미술관으로 재단장되었다. 그러나 이 변신은 오염의 과거를 은폐한 채 도시브랜드를 구축하는 전략이다. 하굿둑은 민물과 바닷물의 생명 순환을 차단했고, 가덕도의 백년숲과 외양포 역시 군사 요새화와 재개발 담론 속에서 복합적인 역사 지층이 삭제되고 있다. 신공항의 청사진으로 표상되는 ‘청록색 자본주의’는 이런 개발을 ‘생태와 공존’으로 포장하며 식민 권력의 전략적 점유 논리를 반복한다. 

 

이 반복되는 공간 식민화의 논리를 전복할 사유의 틀로 한강의 문학을 읽을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정착민 식민주의는 중심 권력이 특정 공간을 ‘정주’의 질서 속에 편입시키기 위해 기존의 기억과 관계망을 지우고, 그 위에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개발·지배의 방식이다. 한강의 작품들은 서울이라는 중심부를 배경으로, 그 중심이 어떻게 타자의 흔적을 체계적으로 소거하는지를 드러낸다. 『채식주의자』의 영혜는 식물로의 전이를 통해 인간 중심적 언어와 정주적 주체성을 벗어나며, 『희랍어 시간』의 여성 화자는 말하지 못함 속에서 비언어적 정동의 교류를 예감한다. 『검은 사슴』의 인물들은 봉쇄된 공간 안에서도 애도와 흔적, 돌봄의 정동을 지워 버리지 않고 떠돌게 한다. 이처럼 세 작품의 인물들은 모두 정착과 비정주 사이를 진동하며, 그 진동이 곧 생기성의 정동적 전이로 나타난다.

 

생기성의 전이는 종과 경계, 기억과 장소를 가로질러 이동하는 방식이다. 한강의 문학은 침묵과 몸, 식물성과 정동을 매개로 이 전이의 궤적을 기록한다. 말보다 느리고 논리보다 앞서는 감각의 지층은 가덕도와 을숙도에서처럼 개발과 미화로 덮인 기억을 비언어의 결을 따라 되살린다. 

 

결국 한강의 글쓰기는 식물처럼 쓰는 글쓰기이며, 정동의 전이를 통해 세계를 다시 쓰는 식물기술학이다. 이 글쓰기는 빛에 반응하고 고통에 기울이며, 침묵 속에서 흔들리는 신체를 통해 관계를 다시 짠다. 여기서 피어나는 식물적 언어는 생태와 기억을 삭제하는 도시의 언어를 거부하며, 언어의 가장자리에서 새로운 뿌리를 내리고, 느리고 오래 숨 쉬는 숲의 시간을 만든다.

 

낙동강 하구둑. 출처: 《부산일보》 2022년 2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