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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집중 탐구

[작가 집중 탐구] 세상을 바꾸는 한강 문학의 힘

by 웹진수이제 2026. 2. 11.

 

세상을 바꾸는 한강 문학의 힘

 

정미숙 (문화사랑 백년어) 

 

 

시대 정신을 찾아서 

한강의 소설 속 인물들은 부조리와 억압에 반항을 하고 있다. 이는 까뮈의 『반항하는 인간』에서 세 번째 유형에 해당하는 창조적인 반항으로 읽힌다. ‘가르치지 마! 강요하지 마! 내가 생각하고 내가 배우고, 내가 판단해. 내가 행동해!’ 라는 강력한 메시지다. 그것은 알베르 까뮈의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진술과 통한다. 까뮈는 반항을 하나의 실존적 태도로 강조하며, 인간이 억압과 부조리에 맞서 반항할 때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시작점이 된다고 본다. 

 

한강의 인물들은 억압과 부조리한 세상에서 살아가다 영혼이 파괴되는 경우가 많지만, 부서진 삶을 재건하고 자신의 가능성과 각자성을 찾기 위해 집요하다. 신도 이성도 믿을 수 없는 이 시대에 기댈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한강의 글들은 삶을 회복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가진 인간성을 찾아가는 지난한 과정으로 읽힌다. 이 글은 한강의 독특한 서술방식과 부서진 삶을 재건하려 노력하는 인물들간의 관계가 주는 메시지에 집중하고자 한다.

 

한강의 서술방식

진실을 찾고자 하는 단호함으로 가면 벗기: 『채식주의자』 

한강의 문장은 짧고 명료하다. 관습적인 명령에 ‘아니오’라고 단호하게 해방감을 느끼게 하는 개인의 목소리다. 대타자의 욕망이라 할 수 있는 ‘집단’이나 ‘전쟁’, ‘애국’, ‘명예’ 등의 가치보다는 ‘나’의 목숨과 사랑에 대한 애착의 목소리이다. 

 

또한, 영혜는 묻는다. “왜 죽으면 안 되는 거야?” ‘나’를 찾아가는 진정한 삶의 탐구자는 물음이 가져올 결과에 상관없이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평화와 행복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추악하고 불쾌할지라도 가면 속의 맨얼굴을 원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기준은 행동과 결과를 잘 내려는 동기가 되고, 완벽주의로 향한다. 완벽주의의 함정은  기준에 맞추기 위해 가면을 쓰고 ‘나’를 잃는다. 제임스 앵소르, 『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 1889.

 

타인의 고통을 체화하는 다양한 관점: 『소년이 온다』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의 화자(극작가) 나는 ‘영영 잃어버린 사람들’ 때문에 괴로워하는 소녀가 나오는 희곡을 쓰다가 도중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건 소녀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고통의 바깥에 있다는 사실이 무섭도록 생생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소설은 이처럼 메타 서사의 양식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고통을 넘어 탄생하게 된 『소년이 온다』에서는 작가 자신의 의지가 작동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을 비워 자의식 없이 쓰게 된다. 여섯 개 장의 서술자는 등장인물이 자신을 비워낸 작가의 몸을 빌려 말하게 되는 독특한 방식이다.

 

-1장. 어린새(동호를 바라보며)-2인칭 서술자와 슬픔의 거리

-2장. 검은 숨(죽은 정대)-1인칭 서술자와 슬픈 자아

-3장. 일곱개의 뺨(은숙)-3인칭 서술자와 슬픔의 객관화-살아 남은 자의 증언

-4장. 쇠와 피(교대 복학생)-서술자와 고백적 관찰자-살아 남은 자의 증언

-5장. 밤의 눈동자(선주)-2인칭 서술자의 슬픔. 광주 이후 20년 지난 시점

-6장. 꽃 핀 쪽으로(동호 어머니)-산 자와 죽은 자의 슬픔. 광주 이후 30년 지난 시점

-에필로그(작가). 그들이 희생자가 아닌 행위자라는 깨달음을 얻음 

 

타인의 고통이 독자에게 다가오는 독특한 방식: 『소년이 온다』 

서술자들은 각자 위기 국면에서 동호를 ‘너’라고 부른다. 2인칭은 오직 한 사람, 내가 부르는 바로 그 사람이다. ‘너’로 불리는 동호와 동호를 ‘너’라고 부르는 ‘나’(작가 또는 다른 인물)는 모두 하나뿐인 개별자로서 ’관계‘ 맺는다. 죽은 소년, 동호를 둘러싼 인물들이 각각의 목소리와 방식으로 동호를 ‘너’ 혹은 ‘동호야’라고 호명하면, 동호는 그들 각각의 현재 삶 속에 들어와서 더불어 존재하게 된다. 

 

한강 소설에서 받은 메시지 

몰락의 에티카(삶의 입법자):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자신을 뛰어넘어 창조하려는 자는 파멸의 길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시신을 수습하는 자들은 안티고네처럼 제도, 관습, 국가법을 벗어나 인간다움(천륜)으로 밀고 나가려는 자, 곧 자신이 삶의 입법자가 되려고 한다. 부조리한 일상에 대한 환멸과 소통불능이라는 절망의 서사인 『내 여자의 열매』에서도 인물들은 자기 삶의 입법자로 나아가려다가 몰락하기도 하기도 한다. 

 

세바스티안노블린, 『폴리네이케스에게 매장을 해주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1825.

 

나약함은 죄의 시작 『바람이 분다, 가라』 

“나약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들의 이야기들. 어린 여자라서 그는 나를 욕망 했어 … 하찮은 여자라서, 어떤 미래도 생각지 않는 여자라서 욕망했어 …. 그를 알았던 십 년 동안 나를 죽였어 …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 손으로.” 

 

“나약함이 죄의 시작일 수 있다는 걸 … 문밖이 낭떠러지인 줄 알면서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어리석음을. 모든 일들의 시작이 자신이었음을, 그러니 자신을 제거하는 것만이 단 하나의 논리적인 길임을 확신하는 순간을.” 

 

나약함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도구가 되어 자신의 삶이 부서진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고통을 통과해 얻는 힘: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다음은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인선이가 어머니에게 느낀 사랑 이야기이다.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다음은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경하가 느낀 사랑 이야기이다. 

 

“그 아이들. 절멸을 위해 죽인 아이들. … 무섭지 않았어. 아니,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행복했어. 고통인지 황홀인지 모를 이상한 격정 속에서 그 차가운 바람의 몸을 입은 사람들을 가르며 걸었어. 수천 개 투명한 바늘이 온 몸에 꽂힌 것처럼. 그걸 타고 수혈처럼 생명이 흘러 들어오는 걸 느끼면서 … 심장이 쪼개질 것 같이 격렬하고 기이한 기쁨 속에서 생각했어. 너와 하기로 한 일을 이제 시작할 수 있겠다”. 

 

다음은 『소년이 온다』에서 작가가 깨달은 사랑 이야기이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 내는 순간 …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 

카테콜비츠,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된다』, 1941.

 

죽음은 가능성 

일상의 세계에서 거짓된 망각의 세계로부터 빠져나와서 내 죽음과 대면해야 비로소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다. 한강의 작품에서 죽으려 했던 자들이 죽음을 직면하며 진정 한 삶으로 나아간다. 죽음으로 미리 달려가 보는 경험은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다시 처음처럼 살아가고 싶게 만든다. 

 

‘창조’로 나아가기: 『노랑무늬 영원』 

“나는 원래 나약하고 혼란스러운, 의지력이 없으며 미성숙한 인간이었지만 그림이 모든 것을 이기고 나를 끌고 다니며 나를 살렸다. 거짓, 나태함, 자기중심성, 비굴함, 천박함으로부터의 나를 끌어 올렸다. 그래서 그것을 포기했을 때, 나는 곧장 낮은 지점, 가장 동물적인 지점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그림 없이 존재의 균형을 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 내 모든 에너지는 그림을 위해 삶에서 유보되었고 저축되었다”.

 

창조 행위를 통해 나아가야 성스러움과 속됨의 균형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카테콜비츠,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된다』, 1941

 

타인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역사 재발견(귀환) 

제주에서, 관동과 난징에서, 보스니아에서, 또 다른 대륙에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잔인성. 폭력의 세계사적 계보에 광주와 제주를 위치시킨다. 한강에게 있어 광주와 제주는 초월이 아닌 영원한 귀환을 의미한다. 이제 존재하지 않는 그 역사적 현장에서 그때를 기억하는 행위는 역사적 상흔에 대한 2차 증인이 되기를 수락하는 것이다. 

 

또한 이 기억으로 글을 쓰고 읽히는 과정에서 또 다른 새로운 2차 증인들을 연쇄적으로 만들어 낸다. 이는 기억이라는 애도 과정을 거쳐서 작별하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의 표명이고 작가와 독자 모두가 역사적 현장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피카소, 『게르니카』, 1937.  //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1951 

 

기품과 고결함을 간직한 타자와의 마주침: 『작별하지 않는다』 

경하가 인선의 ‘기품과 고결함이 있는 아우라’를 느끼는 ‘끌림’의 찰나이다. 

 

“특별한 미인이 아니지만 이상하게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 어떤 말도 허투루 뱉지 않는, 잠시라도 무기력과 혼란에 빠져 삶을 낭비하지 않을 것 같은 태도 때문일 거라고, 인선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혼돈과 희미한 것, 불분명한 것들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 애써 한 모든 일들이 낱낱이 실패하더라도 의미만은 남을 거라고 믿게 하는 침착한 힘이 그녀의 말씨와 몸짓에 배어 있었다”. 

 

인간은 결핍된 존재들이므로 늘 타자를 필요로 한다. 타자와의 만남이 없을 때, 자기 안에 갇히게 되며 무감각한 암흑천지일 뿐이다. 경하가 고통스러운 자기 세계 속에 갇혀 있을 때 인선이 경하를 지옥 같은 자기 세계 속에서 빠져나올 출구가 된다. 

 

엄혹한 연좌제가 시행되는 속에서도 사랑했던 이를 전 생애 동안 애도 

국가법 연좌제가 시행되는 속에서도 『작별하지 않는다』의 강정심은 자신의 일생을 제주 희생자들의 발자취를 찾는데 바친 유족회 회원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시점에 딸 인선이 그 위령 사업을 계승하고, 인선의 친구 경하는 인선과의 공동 프로젝트 ‘작별하지 않는다’를 진행한다. 그들이 한 일은 그들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움으로써 인간적인 어떤 것을 보존한 것이다. 

 

관계로 회복하는 삶: 『작별하지 않는다』 

손가락 잘린 사고를 겪고 병원에 입원한 인선이 경하에게 자신의 제주도 외딴집에 방치된 앵무새를 살리기 위해 제주도로 가달라고 요청한다. 이 요청은 유서 쓰기에 몰두하던 경하를 자신의 삶이라는 지옥에서 잠시 빠져나오게 하는 기이하고 낯선 순간을 만든다. 이 불가항력적인 선택과 고통에의 참여가 오히려 경하를 구원한다. 경하는 인선의 새를 구하지는 못하지만, 눈 오는 벌판에서 스스로 통나무가 되어 자신이 제안한 프로젝트를 실행하게 된다. 이 소설과 동명의 행위예술인 ‘작별하지 않는다’가 행해지는 마지막 장면은 변화와 가능성, 치유와 생성의 미래를 보여 준다. 세상의 폭력 앞에서 연약한 개인들이 연대하여 물결을 이루어 맞설 때, 부서졌던 개인들의 서사가 복원되고 상처 회복의 길이 열린다. 

 

세상을 바꾸는 한강 문학의 힘 

한강의 소설은 시간이 흘러도 반복해서 찾아 드는 후회와 수치와 불안 속에서도 살아가기를 멈추지 않겠다는 굳건한 정신의 걸음, 세상 빛 쪽으로 나아가려는, 우주 본래의 긍정적인 기운에 가 닿으려는 의지의 기록이다. 

 

그리고 고통이나 위기, 공포의 순간들은 삶에 대한 이해를 얻으러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순간인 동시에 부서진 삶을 재건할 수 있는 관계의 힘(연대)을 얻는 곳이기도 하다. 거시적으로 세계를 보면 모든 대상이 독립되고 고립되어 보이지만 미시적으로 보면 고정된 것이 없고 끝없이 작용하고 변화하는 관계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전환과 도약은 강렬한 생의 의지를 촉발하는 다른 세계와의 만남에서 온다. 물론, 소설은 어떤 믿음도, 어떤 약속도 보장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세상이 비밀스럽게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상상하게 해 준다. 작가의 이야기가 끝난 뒤 어떤 접속사를 찾아내서 나의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을지는 독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