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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집중 탐구

[작가 비평] 외제니 그랑데,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여인

by 웹진수이제 2026. 4. 22.

 

외제니 그랑데,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여인  

김지영 (수이제)

 

발자크와 리얼리즘의 힘

 

시대사조는 그 시대가 품었던 뜨거운 열망과 사회적 구조를 대변한다. 19세기의 주요 사조였던 리얼리즘(사실주의) 역시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고, 핍진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소설 기법에 그치지 않는다. 과거 문학을 지배했던 왕족이나 신화적 영웅들의 낭만적인 서사에서 벗어나, 근대 자본주의의 발흥과 함께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극했던 부르주아지의 욕망과 가치를 냉철하게 포착하려는 시대정신의 산물이었다. 즉, 리얼리즘은 낭만적 환상 대신 현실의 냉혹한 물적 토대와 세속적인 성공,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사회적 모순을 대면하고자 했던 지적 투쟁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정신을 가장 집요하고도 광대한 규모로 구현한 인물이 바로 오노레 드 발자크이다. 그는 스스로를 역사가에 비견하며, 개인의 정념과 욕망을 단순한 심리 묘사에 머물게 하지 않고 그것을 생산하는 사회적 조건과 제도, 계급적 이해관계의 망 속에 위치시켰다. 『인간희극』이라는 거대한 기획 아래 그는 프랑스 사회를 구성하는 거의 모든 계층—귀족, 금융가, 성직자, 법률가, 상인, 농민—을 촘촘히 그려내며, 자본과 신용, 상속과 혼인이 인간관계를 조직하는 방식을 해부했다.

 

발자크에게 리얼리즘은 사실적인 정확한 재현이 아니라, 인물들의 삶을 통해 당대 사회를 움직이는 힘의 구조를 드러내는 작업이었다. 그의 소설에서 돈은 단순한 교환 수단이 아니다. 인간의 욕망을 매개하고, 사랑과 우정, 명예마저 가격으로 환산하는 근대적 세계의 보이지 않는 원리로 기능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외제니 그랑데』(1833)에서 밀도있게 다루어진다. 프랑스 지방 소도시 소뮈르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한 가문의 가정사를 다루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본 축적과 상속, 혼인 전략이 지배하는 부르주아 사회의 축소판을 제시한다. 그랑데 영감의 금괴와 막대한 재산은 배경 설정을 넘어, 가족 구성원들의 정서와 삶의 궤적 전체를 조직하는 보이지 않는 질서로 작동한다. 외제니의 순수한 사랑 역시 낭만적 열정에만 머물지 않는다. 재산과 지위, 치밀한 계산이 개입하는 냉혹한 현실의 시험대 위에 놓인다.

그러나 소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자본의 논리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외제니의 태도를 통해 계산과 이익이 지배하는 세계 안에 미세한 균열을 남긴다. 『외제니 그랑데』는 근대 부르주아 사회의 냉혹한 합리성을 드러내면서도, 그 체계에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 한 인물의 내적 윤리를 통해 현실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형식임을 보여준다.

 

『외제니 그랑데』(영문판). 오페라의 구성을 가진 소설 출처: 교보문고

오페라의 구성을 가진 소설

 

『외제니 그랑데』는 작가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드러나는 전지적 시점의 소설이다. 그러나 작품을 읽다보면 오페라를 연상시키는 극적 배열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건 대부분이 그랑데의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전개되고, 인물들 또한 복잡한 심리의 개인이라기보다 하나의 지배적 정념에 사로잡힌 전형으로 제시된다. 더구나 한때 극작가를 지망했던 발자크가 장면 연출에 능숙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물의 배치와 정서의 고조, 갈등의 폭발과 그 여운에 이르기까지 네 막으로 구성된 오페라와도 같은 인상을 준다.

 

 

1막은 서곡에 해당한다. 소뮈르에서 가장 부유하면서도 가장 인색한 그랑데 영감의 집, 외제니의 스물세 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든 데그라생과 크뤼쇼 두 가문의 경쟁적 구애는 이 시골 마을의 세력의 판도를 보여준다. 이 무대에 파리에서 온 사촌 샤를이 돌연 등장한다. 그는 이미 닥친 파산의 그림자를 아직 깨닫지 못한 채 세련된 도시 청년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그의 존재는 닫힌 공간에 변화를 예고하는 외부의 공기를 불어넣는다. 이 장면은 잠들어 있던 외제니의 감정과 욕망을 깨우는 음악적 도입부처럼 기능한다.

2막은 아리아의 장면이다. 아버지의 자살과 파산 사실을 알게 된 샤를의 절망, 그리고 그를 위로하며 사랑을 키워가는 외제니의 마음은 서정적 고조를 이룬다. 특히 외제니가 자신의 금화를 모두 내어주는 장면은 작품 전체의 중심 선율을 이룬다. 금이라는 물질적 가치가 사랑과 헌신이라는 정서적 가치로 전환되는 이 순간만큼은 차가운 리얼리즘이 아니라 사랑을 약속하는 두 청춘남녀의 낭만적이고 숭고한 아리아와 이중창이 들리는 듯하다.

3막에서 갈등은 폭발한다. 그랑데 영감의 분노와 외제니의 감금, 어머니의 죽음은 그랑데 저택을 가부장적 권위와 물욕이 만들어내는 비극적 색채로 물들인다. 여기서 무대는 갑자기 적막해진다. 빵과 물만 허락된 방 안의 고요. 사랑을 위해 선택한 행위가 폭력적 권력과 충돌하면서, 작품은 가장 어두운 음역으로 내려간다. 이 장면은 단지 가족 내부의 갈등이 아니라 자본과 권력이 개인의 정념을 억압하는 근대적 현실의 극적 표상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 4막은 피날레에 해당한다. 세월이 흐른 뒤 부를 축적하고 돌아온 샤를은 이미 계산과 지위의 논리에 완전히 동화된 인물이 되어 있다. 그의 배신은 비극적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외제니의 선택이다. 그녀는 상처 속에서도 그의 빚을 대신 갚아 그의 결혼을 도와주며, 자신은 크뤼쇼 가문의 사람과 형식적인 결혼을 통해 사회적 관습이 요구하는 틀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결국 홀로 남아 자선과 선행에 삶을 바친다. 이 결말은 승리도 패배도 아닌, 고독한 장엄함으로 남는다. 막이 내리며, 현실에 상처받지만 그 현실을 넘어서는 외제니의 내적 윤리의 선율이 사라지지 않는 잔향처럼 남는다.

 

전형성과 루카치의 리얼리즘론

 

『외제니 그랑데』는 1835년 바야르와 뒤포르에 의해 <구두쇠의 딸>이라는 제목의 연극으로 각색되어 300회 이상 장기 상연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작품을 오페라적 구조로 읽으려는 시도가 전혀 근거 없는 상상만은 아님을 방증한다. 무엇보다 이 소설에서 오페라적 구성을 떠올리게 되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를 꼽자면, 아마도 인물의 ‘전형성’일 것이다. 관객이 단번에 알아챌 수 있도록 정형화된 이들의 성격은 복합적인 심리 묘사보다는 선명한 상징적 대립을 통해 서사의 비극성을 극대화하는 오페라의 문법과 일맥상통한다.

 

『유럽의 리얼리즘 연구』 영문판. 출처: 교보문고

 

발자크의 인물은 분명 전형적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성격이 상투적이거나 평면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게오르크 루카치가 『유럽의 리얼리즘 연구』 (1948)에서 규정한 의미의 전형, 곧 한 시대의 사회적·역사적 본질을 구체적 개인의 형상 속에 응축해 드러내는 전형을 가리킨다. 마르크스주의 역사철학의 영향을 받아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와 계급 역학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려 했던 루카치는 그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리얼리즘을 옹호하였다.

그는 역사적·사회적 총체성을 구체적 개인의 삶 속에 응축해 보여주는 형식으로 리얼리즘을 규정한다. 전형적 인물이란 특정 계급이나 시대의 구조적 조건을 대표하면서도, 동시에 살아 있는 개별자로 존재하는 인물이다. 다시 말해 전형은 평균치나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 힘들이 한 인물의 운명 속에서 충돌하고 응결된 구체적 형상이다. 루카치가 보기에 리얼리즘의 탁월함은 바로 이러한 매개 능력, 곧 개인과 사회, 주관적 정념과 객관적 구조를 분리하지 않고 하나의 서사적 형상으로 통일하는 데 있다.

이 점에서 루카치는 발자크를 특별히 높이 평가했다. 정치적으로는 왕정복고를 지지했던 보수적 작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르주아 사회의 운동 법칙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포착했다는 것이다. 발자크의 인물들은 각기 하나의 지배적 정념—금전적 탐욕, 사회적 상승 욕망, 사랑, 허영—에 사로잡혀 있으나, 그 정념은 결코 사적인 심리 현상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신용 체계, 상속 제도, 결혼 전략, 계급 이동의 가능성과 같은 객관적 조건과 긴밀히 얽혀 있다. 따라서 발자크의 전형은 개별 인물의 성격 묘사를 넘어,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인간을 어떻게 형성하고 규정하는지를 드러내는 역사적 표지로 기능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외제니 그랑데』의 인물들 역시 루카치적 의미의 전형으로 읽힐 수 있다. 그랑데 영감은 탐욕스러운 구두쇠로 화폐 축적의 원초적 충동을 인격화한 존재이며, 샤를은 식민지 무역이 확장되던 시기에 감정마저 계산의 대상으로 치환하는 신흥 부르주아적 주체의 전형이다. 또한 데그라생과 크뤼쇼는 각각 재산 관계를 제도적으로 조직하는 법률가 계층과 혼인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지방 세력의 야망을 대변한다. 이처럼 이 작품은 개별 성격 묘사를 넘어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계급적·경제적 구조를 총체적으로 드러내는 전형들의 집합으로 읽힐 수 있다.

 

외제니를 향한 발자크의 시선

 

그렇다면 이 소설의 중심 인물인 외제니 역시 전형적 인물일까. 루카치의 관점에서는 그렇다. 그녀는 화폐가 가족 구조와 혼인 제도를 조직하는 사회에서 형성된 여성의 역사적 위치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외제니의 스물세 번째 생일은 그녀가 상속자이자 혼인 시장의 핵심 자산이 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이다. 그녀가 샤를에게 금화를 주고, 배신 이후에도 그의 빚을 갚아주는 행위는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도덕적 저항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아버지의 자산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체계에 의존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외제니는 낭만적 예외가 아니라, 화폐 관계가 인간적 감정까지 전유하는 시대의 내적 모순을 구체적 삶에서 드러내는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외제니는 소설 속 전형적인 인물들과는 다른 광채를 지닌다. 이는 무엇보다 발자크가 그녀를 바라보는 애정 어린 시선에서 비롯된다. 발자크는 외제니를 “정신이 알아보는 아름다움”을 지닌 인물로 묘사하며, 그녀의 얼굴에서 성모의 순결을 연상시키는 고요한 눈빛과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고귀함을 발견한다. 샤를을 향한 사랑 역시 이러한 순수성 속에서 싹튼다. 외제니는 자신의 감정을 의심하지 않은 채 “천사 같은 본성”을 따르지만, 샤를의 배신은 그녀에게 완전한 파국으로 다가온다. 다른 여자들이라면 원한과 복수로 치달았을 상황에서도 외제니는 침묵 속에서 고통을 감내하며 “참된 사랑, 천사의 사랑, 고통으로 살아가고 고통으로 죽는 자존심 높은 사랑”을 끝까지 지속한다.

발자크는 이 고결한 영혼을 보호하기 위해 파격적인 서사적 장치를 마련한다. “신부님, … 결혼 후에도 처녀로 남는 것이 죄가 될까요?”라는 외제니의 소망에 응답하듯, 그는 재산만을 노린 봉퐁 판사와의 결혼을 명목상의 계약으로 설정하여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외제니의 삶을 지켜낸다. 그리고 결혼계약서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꾸미며 아내의 죽음을 기다리던 봉퐁 판사를 신의 심판으로 일찌감치 퇴장시켜 그녀에게 막대한 부를 남긴다. “이리하여 신은, 금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천국을 갈망하며 경건하고 선하게 살면서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에 지치지 않는 이 갇힌 영혼에게 금더미를 던져 주었다. 마담 드 봉퐁은 서른여섯의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이후 외제니는 아버지의 집에서 하녀 나농과 함께 검소한 삶을 이어가며, 막대한 재산을 자신을 위해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은 채 오직 타인을 위한 자선과 선행에 내어준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마을 사람들은 다시 그녀의 재혼을 두고 수군거리지만, 그 소문은 결국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외제니와 나농은 세상의 부패한 계산과 욕망을 이해할 만큼의 정신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랑데의 집은 이제 소뮈르를 지배하던 부르주아적 욕망이 더 이상 침투하지 못하는 외제니의 요새로 남는다. 이렇게 발자크는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외제니 그랑데의 이야기를 끝맺는다.  

 

출처:  https://commbooks.com/

 

자크 데리다의 ‘선물’의 논리와 외제니

 

발자크는 외제니를 거의 ‘성녀’에 가까운 존재로 묘사하며 그녀를 부르주아지의 자본주의적 욕망에 잠식되지 않은 인물로 그려냈다. 외제니를 묘사하는 어조 또한 신랄하지 않고 따스하다. 그는 자본주의가 시대의 대세로 사회 전반을 점령해 가는 현실을 통찰력 있게 해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힘에 완전히 굴복되지 않는 어떤 공간을 작품 속에 남겨 두고자 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라는 “세계 속에 살지만 그 세계에 완전히 속하지 않는” 외제니의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론적 시선이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자크 데리다의 선물 이론은 흥미로운 해석의 통로를 제공한다. 자본주의의 교환 질서가 모든 관계를 계산과 등가 교환의 논리로 환원하려 할 때, 데리다는 『시간을 주다』(1991)에서 선물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 체계의 빈틈을 사유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외제니의 증여와 헌신은 단순한 도덕적 미덕이 아니라, 교환의 세계 한가운데서 그 논리로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 어떤 잔여를 드러내는 사건으로 다시 읽을 수 있다. 

데리다는 『시간을 주다』에서 선물이 마주하는 ‘아포리아’, 곧 논리적 막다름을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진정한 선물은 단순한 증여가 아니라 주고받음의 경제적 순환을 끊는 사건이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교환경제가 부채와 상환의 논리로 작동하는 이상, 감사나 보답, 혹은 도덕적 만족을 기대하는 순간 선물은 이미 거래로 변한다. 그래서 선물이 선물로 남기 위해서는 주는 자는 자신이 준 사실을 잊어야 하고, 받는 자 역시 그것을 선물로 인식하지 않아야 한다는 역설적 조건이 제시된다. 데리다는 바로 이러한 불가능성 속에서 자본의 순환 구조에 균열을 낼 가능성을 본다.

이 선물의 윤리는 데리다가 말하는 ‘시간을 준다’는 개념과도 연결된다. 경제적 교환이 미래의 상환을 전제로 하는 계산 가능한 시간이라면,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 선물은 그 계산을 중단시키고 타자에게 새로운 시간을 열어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외제니가 사촌 샤를에게 금화를 내어주는 장면은 단순한 연민의 행위를 넘어 자본주의 문법에 대한 도전으로 읽힐 수 있다. 그랑데 영감에게 금화가 이자를 낳는 축적된 시간의 결정체였다면, 외제니는 그것을 아무런 대가의 약속 없이 건넴으로써 계산 가능한 자본을 계산 불가능한 선물로 전환한다.

더 나아가 그녀가 샤를의 부친이 남긴 막대한 부채를 대신 갚아주는 결단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부채가 타자를 지배하는 강력한 권력 장치라면, 외제니는 그를 원망하거나 도덕적 빚을 요구하는 대신 그 굴레에서 풀어준다. 이는 배신조차 교환의 논리로 돌려주지 않고 타자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는 행위다. 비록 샤를이 그 시간을 다시 계산과 축적의 세계로 되돌려 놓지만, 외제니의 증여는 잠시나마 자본의 질서를 중단시키는 사건으로 남는다.

 

루이즈 부르주아의 <외제니 그랑데> 2009. 콜라주: 자수, 금속, 플라스틱, 유리, 드라이포인트, 에퀴틴트, 천에 디지털 프린트.  발자크의 소설 <외제니 그랑데>에서 주인공 외제니 그랑데를 기리는 오마주 작품이다. 이 작품은 고향 프랑스에서 가져온 손수건과 조화, 단추 등 개인 소지품을 덧붙여 16점으로 구성되었다. 출처: https://blog.naver.com/herbst2018/

 

 

 

그리고 외제니가 막대한 부를 쥐고도 그 오래된 저택에서 늘 그래왔듯이 검소하게 살아가는 결말은 자신의 증여가 다시 세속적인 교환의 질서에 휩쓸리지 않도록 그 자리에 멈춰 선 삶의 양식을 보여준다. 만약 그녀가 그 돈을 화려한 사교계에서 소비하거나 재투자했다면, 그것은 다시 자본주의의 순환 속으로 포섭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본을 다시 자본으로 증시키라는 세상의 명령을 거부하고, 오직 타인을 위한 대가 없는 자선으로 재산을 방류시키며 스스로 ‘세상에 속하지 않은’ 요새가 된다. 결국 외제니는 모든 것이 거래되는 세상에서 결코 거래되지 않는 단 하나의 ‘무조건적 증여’의 형식을 지켜냄으로써, 거대한 자본의 시스템이 결코 완전히 장악할 수 없는 인간적 잔여를 자신의 삶으로 증명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소설의 피날레는 세상에서 소외되어 적막한 저택에서 기도를 하며 부르는 고독한 아리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세상의 부패를 모르는 이들이 낡은 식탁에 앉아 나누는 잔잔한 식사 소리와 같다. 자본의 권위가 침범할 수 없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맑고 고요한 흥얼거림의 잔향이 퍼지는 가운데 무대의 막은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