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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사유의 눈길] 정동적 놀이, 위대한 정오의 시간

by 웹진수이제 2026. 4. 22.

 

정동적 놀이, 위대한 정오의 시간

김충국 (부산대 영화연구소)

 

 

 

하나의 유령이 한국을 떠돌고 있다 – 정동이라는 유령이. 옛 한국의 모든 세력들, 즉 국가권력과 자본가, 마르크스주의자와 신좌파가 이 유령을 맞이하기 위해 신성한 동맹을 맺었다.

 

  눈치 빠른 분은 단박에 알아차리셨겠지만, 저 글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의 첫 문장을 유치찬란하게 고친 것이다. 서양에서 뭔가 새로운 게 나오면 열심히 실어 나르는 식민지형 학계 풍토의 천박한 유행이라고 치부하기엔, 저 말장난처럼 오늘날 정동의 힘은 매우 세다. 정동은 나의 마음과 행동을 설명하는 방법이며, 사회적 징후이자 증상이며, 들어보면 이 말 같다가 다시 보면 저 말 같기도 한 변덕스러운 단어이다.

 

정동이란 무엇인가

정동이론의 원조 스피노자(좌)와 21세기의 후계자 마수미(우). 외모도 닮았다.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정동이란, 브라이언 마수미라는 이상한 이름의 멋지게 생긴 미국 남자 철학자의 정의에 의하면, ‘정동하고 정동되는 힘’이다. 이 정의는 마치 “북쪽은 북의 방향이다”처럼 허탈하다. 그러니까 그냥 ‘힘’이라는 말에만 주목하자. 또 정동은 생소한 말이지만 예전부터 어디선가 들어본 말이기도 하다. 조울증을 고급스레 표현한 ‘양극성 정동 장애’가 그것이다. 이 병은 정서의 장애가 아니다. 나처럼 정서가 메마른 사람이 정서 장애다. 정동 장애는 정서가 치닫는 힘을 제어할 수 없는 장애다.

  그러므로 정동의 본질적 의미는 힘에 있다. 이 힘을 물리학적으로 폼 나게 표현하자면 스칼라가 아니라 벡터다. 벡터는 방향이 포함된 양이다. ‘힘’이라는 단어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 그 안에는 가능성, 즉 능력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예를 들어 ‘노동력’은 노동의 힘이 아니라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둘째, 작용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즉 힘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거다.

  이제 대충 정리되었다. 정동은 정서의 강도(=양), 역량(=능력), 전이(=작용)에 주목한다. 그래서 정서든, 감정이든, 기분이든, 어쨌든 뭐 그런 것들의 강도, 역량, 전이에 주목한다면 우리는 뭐 그런 것들을 싸잡아 ‘정동 이론’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정동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정서나 감정과 동의어처럼 쓰이면서 그것의 힘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동어반복처럼 보이는 마수미의 정의는 말이 된다.

  조금 더 들어가 보자. 오늘날은 감정의 시대이다. 감정이라는 단어는 내가 임의로 선택한 것인데, 정서, 정동, 기분 등등 뭐라 불러도 상관없다. 요즘 우리가 즐겨 쓰는 인공지능한테 물어보면 그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여 제시하는데 그딴 건 무시하자. 자신의 마음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온갖 느낌들을 저 네 가지 범주로 구분해 낼 수 있다면 자신의 위대함을 세상에 크게 외쳐도 좋다. 다만 감정을 선택한 데엔 소박하면서도 깊은 뜻이 있는데, 감정은 한자로 ‘느낄 감’과 ‘뜻 정’이니 ‘외부의 어떤 작용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일어나는 마음’이라는 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즉 감정은 외부에서 주어진 자극에 대한 반응이다. 정동 이론의 원조라 할 만한 스피노자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신의 수동이라 불리는 감정은 어떤 혼란된 관념이다.” 이 말씀이 “내 마음 나도 몰라”라는 불가지론의 본질이다. 나의 마음은 외부의 자극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리는데 우리는 자극과 마음 사이의 인과적 사슬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원인을 모르니 해법이 없다.

 

어느 젊은이의 삶

 

  절친이 해외여행을 가서 인스타그램에 사진으로 자랑질을 해놨다. 나는 그를 여전히 좋아하지만, 그 시간에 집구석에서 라면을 처먹고 있는 내 모습을 생각하노라면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고 괜스레 짜증도 난다. 그래서 멋진 카페에서 설탕을 때려 부은 예쁜 케이크를 시키고 사진을 찍어서 인스타에 올린다. 그것은 복수의 감정일까, 보상의 감정일까. 해외 여행에 뜬금없이 설탕 섭취로 대응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일까.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심란하지만 어쨌든 저녁은 굶어야 한다. 이미 칼로리를 과잉섭취한 데다가 건강한 음식을 먹자니 충동적인 식비 지출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유튜브의 먹방으로 식사를 대체하기로 한다. 뇌는 부른데 위가 고프니 잠이 안 와서 숏폼을 새벽까지 본다. 조금 전에 본 장면도 기억나지 않지만 눈을 뗄 수가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뇌가 썩는 느낌을 받는다.

  다음날 알바 출근을 했는데 웬 손님이 진상질을 한다. 수면과 영양이 부족한 상태에서 그 진상을 받아내고 나니 영혼이 다 털린 기분이다. 다 때려치우고 집에 가고 싶은데 그러면 돈에 쪼들릴 것이므로 입 닥치고 퇴근시간까지 버티기로 한다. 나의 인내력과 현명한 선택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는 합리적 판단 하에 인터넷 쇼핑몰을 뒤적거리다가 결국 비합리적 소비를 하게 된다. 그 비합리적 목록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의 응원봉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비합리적 선택이 나만의 행동이 아님을 확인하고 남한테도 권장하고자 팬 카페에 들어가 자랑질을 늘어놓는다.

  많은 과장과 폄하가 담겨 있지만 기성세대들은 요즘 젊은이들이 그딴 식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또는 상상)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초연결시대엔 어른이라고 별수 없다. 실제론 똑같이 사는 주제에 어른이랍시고 늘어놓는 훈수라는 게 “나 때는 … ”이다. 나는 그런 감정 따위에 휘둘리지 않았노라고, 나는 책도 많이 읽고 세상에 대한 고민도 많았노라고. 그런데 너는 왜 그리 나약하고 개인적인가. 앞으로 세상이 어찌 될지 걱정이다, 등등.

 

알 수 없는 마음이 세상을 바꾼다

 

  그러던 어느 날 대통령께서 계엄을 선포하셨다. 그 젊은이는 응원봉의 영롱한 불빛을 보며 방구석에서 뒹굴거리다가 갑자기 그걸 들고 거리로 뛰쳐나간다. 아빠는 자식이 뛰쳐나갔는지도 모른 채 텔레비전을 보며 칸트가 말하는 소위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을 골똘히 펼치고 있다. 이것은 위헌이며 셀프 쿠데타다 ... . 민주주의의 위기 상황이지만 젊었을 때 읽은 러시아 혁명사에서 읽은 코르닐로프 장군의 반란과 비슷한 상황 같은데 그렇다면 이 사태는 오히려 혁명의 불쏘시개가 아닌가 … . 그런데 겨울이라 추울 것 같고, 게다가 혁명을 하기에는 이미 자본주의 물을 너무 많이 먹은지라 ‘다가올 해방 세상’에 도저히 적응할 자신도 없다. 그래서 혁명은 포기하고 평생 해왔던 세상 걱정을 하면서 집에서 계속 텔레비전을 지켜보기로 한다. 모처럼 친구들과 카톡으로 정세 토론을 한바탕 벌이고 나니 젊어진 듯하여 기분이 좋아진다.

  정리하자면, 철부지 같던 자식은 길거리에서 나라를 구했고, 아빠의 고매하고 위대한 이념은 무기력했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자식은 새로 나온 응원봉을 살 것이고, 부모의 합리적 이성은 그게 못마땅할 것이다. 이념이 무기력해진 시대에도 무언가가 무심하고도 고요하게 열일을 해내고 있다.

 

인공지능에게 시위용 쇠파이프와 응원봉을 그려 달랬더니 이런 작품을 내놓았다. 대견하고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두렵다.

 

 

  갖고 놀던 응원봉을 들고 그 추운 겨울 길바닥에서 며칠을 버티게 만든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성이나 이론의 작용이 아니다. 그런데 이념으로 무장한 투쟁보다도 질기고 강하다. 이성이니, 이론이니, 이념이니, 이렇게 ‘이’자 들어가는 건 언어의 질서로서, 그 세계는 저 아빠처럼 깊은 사유와 결심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면 감정의 작용인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정동 이론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스피노자의 위대함은 정신과 신체를 하나로 보았다는 데 있는데(유식한 말로 ‘심신일원론’이라고 한다), 이건 17세기의 유럽 사회에서 매우 발칙한 주장이었다. 인간의 정신은 고귀한 것이고 신체는 좀 문제가 있다는 식의 관점은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종교적 엄숙주의자들의 논리적 전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정신과 신체를 하나로 맞붙임으로써 인간의 욕망을 긍정한다. 즉 존재를 지속하려는 노력(‘코나투스’라고 한다)을 인간의 현실적 본질로서 긍정한다. 정신은 저 고귀한 이상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를 향한다. 그래서 우리의 감정은 신체의 활동능력이 증대되거나 감소됨에 따라 나타나는 신체의 변용이자 관념일 뿐이다. 그러나 ‘코나투스’가 인간의 본질인 이상, 감정에 귀 기울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 . 뭐 대충 이런 식이다. 스피노자를 단순화하는 감이 있더라도(이 글만으로는 스피노자가 쾌락주의자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에피쿠로스보다 공자에 더 가까운 사람이다) 여기까지만 하자.

 

방치된 정동은 갈팡질팡한다

탄핵 정국 당시 대구에서 등장한 대자보. 합리적 논증보다 더욱 강력하게 세상을 때리는 정동적 반응의 힘이다. 출처: 대구여성의전화 페이스북

 

  오늘날 정동 이론은 다양한데, 대체로는 17세기 스피노자의 저 고귀한 생각으로 메주를 빚고 19세기 마르크스의 삐딱한 시각과 20세기 들뢰즈의 현학적 허세라는 짠물을 부어 담근 유서 깊은 씨간장을 공유하고 있다. 같은 씨간장이라도 집 따라 고을 따라 장맛이 다르듯이 정동 이론 역시 그렇다. 그러나 대체적인 숙성법은 장독의 간장 위에 둥둥 뜬 언어의 논리를 싸그리 걷어내고, 감정 역시 의식적이고 언어로 규정 가능한 것이므로 그것도 신중히 걷어내고, 앞서 말한 감정의 강도, 역량, 전이에 주목한다. 이 순수한 간장을 흔히 정동이라 부르는데, 어찌나 맑고 투명한지 말로 설명하기 힘들지만 대충 묘사하자면 ‘찰나의 순간에 신체를 통해 비의식적으로 발현되는 힘’이다. 그런데 이게 오늘날의 인간과 세계를 설명하고 우리의 나아갈 바를 제시한다.

  실제로도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이성과 논리가 아니라 불안, 혐오, 희열처럼 피부에 느껴지고 신체적 반응을 즉각적으로 이끌어내는 정동들이다. 이 정동은 내란범이 되실 분을 대통령으로 뽑기도 하고, 괜히 설탕을 과잉 섭취하게도 만들고, 공연한 과소비를 하게도 만들고(이 글의 맨 앞에 언급한 ‘신성동맹’에 자본가가 참여한 이유다), 추운 길거리로 뛰쳐나가게도 한다. 또 정동은 전염력이 대단해서 기독교 집회에 유대교의 상징기를 펄럭이게도 하고, 살벌한 정치집회를 신나는 응원봉 놀이판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그러니까 즉자적 상태의 정동은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셈이다. 그런데 만약 나의 정동을 좀 더 능동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일관되게 행복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나의 마음을 소진시키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에서 벗어나 나를 기쁨으로 이끄는 것이 무엇이며, 그 기쁨을 나눔으로써 함께 나아가려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비로소 나는 진정한 나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로써 인간의 정동을 탐구한다는 것은 나의 본능과 행복을 사회의 진보에 합치시키는 단서를 마련하는 일이 된다.

 

정동은 힘이 세다

 

  영화를 예를 들어보자. 한국영화 100여 년을 대표하는 영화,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이다. 이 영화는 유신 시대라는 당시의 상황에서는 매우 불손한 영화였는데(그래서 검열로 누더기가 되었다),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 또는 그 표식인 장발, 미니스커트, 청바지 등이 그 불손함의 증거로 거론된다. 나는 매년 강의마다 학생들과 함께 전편을 다 보므로 거짓말 조금 보태서 100번은 본 것 같은데, 마르고 닳도록 보다 보니 다른 게 보이기 시작했다. 주인공들이 반체제적인 이유는 아무 계획이나 대책 없이 마냥 놀기만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능력해서 못 하는 게 아니다.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 하는 것이다. 영화 초반의 주인공들은 세상을 즐겁게 살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웃고 까불지만, 자세히 보면 그 뒤엔 짙은 슬픔이 배어있다. 스피노자의 슬픔은 나의 역량이 제약받을 때 발생하는 감정이다. 시대로부터 자신의 역량을 보존하기 위해 그들은 세상에 등 돌린 채 자기네들만의 놀이를 선택했다. 조르조 아감벤이라는 분께서 말씀하셨듯이 그것은 “하지 않을 능력”이며 그 선택은 체제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일종의 ‘정동적 사태’이다.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서 주인공들은 항상 즐겁다. 그런 장면을 갈무리했는데 뜻밖에도 영화에서는 보이지 않던 슬픈 느낌이 포착되었다. 이로써 이 글의 논지는 증명된 셈일까. 출처: 저자 갈무리

 

 

  이 영화의 혁명성은 바로 그 사태의 지점에 있다. 이 영화는 1970년대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80~90년대 이념의 시대에는 매우 개인주의적이고 순진한 영화로 보였다. 그리고 이념의 시대가 끝난 이후에 영화에 내재한 혁명적 성격이 비로소 발현되었다. 이렇게 이 영화는 역사의 변증법을 몸소 체현해 보인다. 그래서 이 영화는 결코 낡지 않는다. 아감벤이 자신의 저서『예외상태』에서 하는 말씀을 인용해 보자.

 

정치적 혁명이란 법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법을 탈작동하게 만듦으로써 그것을 인류의 놀잇감으로 되돌려주는 것이다. 능력이 그 목적(생산)으로부터 해방될 때, 그것은 비로소 자유로운 잠재성이 된다.

 

 정동적 놀이의 힘은 진중한 이념보다 세다. 그리고 그 힘이 단순히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은 우리가 지난 계엄과 탄핵 정국에서 이미 목도했던 바다. 이념과 이념이 맞부딪칠 때 그 과정은 종종 적대적 폭력(언어적이든 물리적이든)이 수반되고 힘의 논리에 의하여 끝장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슬프게도, 인류사적으로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공권력이 없는 쪽이 와장창 깨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소위 ‘빛의 혁명’(이 표현은 너무나 진지해 보여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에서 보여줬던 젊은이들의 응원봉과 유행가 떼창과 장난스런 깃발들은 역설적이게도 법과 시스템의 억압을 순식간에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남태령의 트랙터는 ‘적들의 폭압을 뚫고’ 돌진한 것이 아니라 체제의 작동이 정지된 시간으로부터 ‘무심하게’ 굴러간 것이다. 그 ‘무화’의 시간은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모든 그림자가 사라지는 “위대한 정오의 시간”이다. 이 시간이야말로 절대적인 생의 긍정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순간을 창조하는 것이 바로 정동의 역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