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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사유의 눈길] 언어와 정동 - 한문숭배에서 영어숭배로

by 웹진수이제 2026. 4. 22.

 

언어와 정동 - 한문숭배에서 영어숭배로

김영환 (수이제)

 

 정동, 감정, 기분

 

정동은 감정이나 기분보다 더 근본적이고 생생한 에너지로서 비언어적 특성을 갖는다. 그것읒 말로 분명하게 말하기 전의 신체적 반응이자 에너지의 흐름으로 즉각적인 느낌을 일컫는다. 따라서 정동은 구체적인 감정 이름이 붙기 전의 불안, 긴장 등의 감각이다. 개인적이면서도 주위 환경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정동은 언어라는 틀을 만날 때 비로소 감정으로 객관화된다. ‘가슴이 답답하다’라는 신체적 정동에 '슬픔' 혹은 '억울함'이라는 낱말을 붙이는 순간, 그 감정은 우리가 다룰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사용하는 단어가 가멸질수록 자신의 정동을 더 세밀하게 구분할 수 있다. 언어는 정동에 이름을 붙여 분절하고 사회적으로 공유 가능한 감정이 된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언어는 정동의 생생함을 제한하기도 한다. 낱말의 틀에 갇히는 순간, 언어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떨림은 사라진다.

 

우리가 언어로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은 정동과 연속선 위에 있지만 같은 개념은 아니다. 감정은 사회적으로 이름 붙여지고 해석된 이후의 느낌이다. 정동은 개인 내부에만 있지 않고 몸과 상황 사이에서 발생한다. 언어는 정동을 표현할 뿐 아니라, 정동을 조율하고 증폭하거나 특정 감정으로 굳혀 버리는 역할을 한다. 억양과 말의 속도는 정동의 영역이고 “화났어”, “기분 나빠”는 감정의 영역이다. 정동은 느끼는 과정이고, 감정은 그 결과에 붙은 이름이다.

감정과 기분도 연관되어 있다. 기분은 개인에게 귀속되고 비교적 지속적이다. 기분은 이미 정동이 해석된 결과이다. 기분은 단순한 심리 상태가 아니라 세계가 어떻게 열리는가를 결정하지만, 정동은 그 기분 이전에 세계를 순간적으로 흔드는 것이다. 정동은 아직 주어가 없는 사건이고 기분은 “내가 느낀다”로 귀속되는 상태이다. 그래서 정동은 정치·미디어·공간 분석에 강력한 힘으로 작동하고, 기분은 개인적인 심리·치유 담론에서  작동한다.

 

때때로 정동은 언어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시와 예술에서는 산문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정동을 전달하기 위해 비유, 상징, 운율 등을 사용한다. 정동과 감정의 관계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존재자 관계와 유비해서 생각할 수 있다. 정동은 언어 이전의 조건처럼 작용하고, 언어는 그 정동을 특정한 의미로 드러내는 방식이다. 물론 형이상학적 차원을 빼고 하는 말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하이데거의 말처럼, 정동이 우리 삶의 원동력이라면 언어는 그 에너지가 머물고 소통되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언어는 소통의 매체인가 

 

언어와 이데올로기를 다룬 볼로쉬노프의 고전 출처:교보문고

 

 

 언어가 소통의 매체라고 자주 말한다. 그러나 중요한 측면을 빼고 하는 말이다.  언어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특정 권력과 이데올로기를 담는 그릇이다. 언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특정 방식으로 세상을 보게 만드는 거르개이다. 어떤 특정한 정동을 나타내는 낱말은 없다. 과거에 '성희롱'이나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가 사회적으로 통용되기 전까지, 그 고통은 언어화되지 못해 사회적 의제로 소통될 수 없었다. 또 어휘나 언어 규칙에 가부장적 질서나 계급적 가치가 깃든 경우가 많다.

 

순한문 <한성순보>. 출처: 위키백과

 

 

 이런 이데올로기적 한계에도 언어가 소통의 매체라고 말하는 까닭은, 그것이 최소한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소통은 완벽한 일치가 아니라 공유된 규칙 위에서 일어난다. 언어라는 불완전한 도구라도 없으면 우리는 타인의 내면에 전혀 접근할 수 없다.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들이 언어를 통해 논쟁하고, 타협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곧 소통이라 할 수 있다.

 

언어는 지배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억압받는 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빌려 쓰는 해방의 도구이기도 하다.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낱말을 늘리거나 축소된 의미로 쓸 수 있다. 기존의 언어가 차별과 편견을 고착화한다는 측(언어의 이데올로기성 비판)이 있을 수 있고, 이런 언어에 대한 언어 통제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소통을 경직시킨다는 측(소통의 자율성 옹호)이 있을 수 있다. 낱말을 바꾸는 행위는 그 대상에 대한 사회적 지위를 재설정하려는 정치적 시도이기도 하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소통은 단순히 논리적 근거를 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느끼는 불안이나 분노의 정동을 먼저 이해하고 다독이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언어는 그 정동의 파도가 가라앉은 뒤에야 비로소 제 기능을 할 수 있다.

 

 정동을 배제한 ‘과학적’ 국어학

 

그동안 언어를 형식적 체계로만 다루었고 감정, 느낌, 정서 같은 정동은 주관적·비과학적 요소로 간주되어 의도적으로 분석 대상에서 배제되었다. 일제 하 경성제대에소개되었고 해방 후 서울대를 중심으로 남한에 번져 우리말 연구의 주류가 된 ‘과학적’ 국어학이 바로 그것이다. 과학을 내세워 감정이나 가치판단을 극도로 피해간다. 감정이나 가치 판단에는 어떤 인지적 요소도 없어 객관성을 훼손한다는 생각이다.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게 이들이 주시경과 조선어학회의 전통을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라고 강하게 배척한다는 점이다. 흔히 내적 언어학이라고도 불리는 닫히고 거세된 언어학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부딪히는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그런 데 대한 관심은 불순한 것인 양 다룬다. 그리고 앵무새처럼 되뇐다. 언어는 중립적 소통의 매체라고. 오늘날 남한의 언어가 극단적 영어 숭배 현상이 기승을 부려도 이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은 이런 생각을 금과옥조로 받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동은 언어학에서 완전히 잊힌 적은 없다. 다른 분야의 개념들로 우회적으로 다뤄졌을 뿐이다. 예를 들면, 말하는 이의 태도, 의도, 담화분석에서 다루어졌다. 1990년대 인문 사회과학에서 말하는 정동적 전환과 함께 언어학에서도 정동은 다시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 남한에서 보이는 극단적 영어 숭배는 우리가 영어, 즉 미국말에 대해 어떤 정동을 갖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요즘 젊은이들은 '아내'보다 '와이프'라는 영어를 더 자주 쓴다. 이런 현상은 단순히 세련된 표현을 선호하는 취향의 문제를 넘어, 그 이면에 아주 강력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정동이 숨어 있다. 경성제대 언어학 이후로 이런 현실의 정동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기도록 만든다. 딸깍발이 선비로 알려진 국어학자 이희승, 현대 국어학의 개척자라는 이숭녕 서울대 교수가 이런 흐름을 대표한다.

 

 

 

영어하기 편한 도시 비전선포식. 출처: <국제신문>. 2024.02.06.

 '아내'라는 낱말은 한국어의 역사 속에서 가부장적 질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왔다. 안/밖의 구별에서 '아내'의 어원이 '안(ㅎ) + 애'에서 왔다는 설이 있듯, 이 낱말에는 여성을 집안에 머무는 존재로 규정하는 성별 분업적 이데올로기가 깊게 박혀 있다. 현대인들에게 '아내'라는 낱말은 정동적으로 다소 무겁고, 보수적이며, 전근대적인 느낌을 줄 때가 많다. 반면 '와이프'라는 단어가 주는 이데올로기적 해방감이 있다. 이 영어도 역시 가부장적 역사를 갖지만, 한국어 맥락으로 들어와 '와이프'라고 부를 때 사용자들은 자신이 좀 더 현대적이고 수평적인 부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이데올로기적 만족감을 얻는다.

특정 단어를 선택하는 행위는 "나는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를 드러내는 정치적 행위이다. 영어를 섞어 쓰는 행위는 은연중에 자신의 교육 수준이나 도시적 감수성을 드러내는 구별 짓기의 도구가 된다. 결국 '와이프'라는 단어의 득세는 한국 사회가 가부장적 전통 언어가 주는 정동적 피로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래어라는 이념적 도피처를 선택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시대가 원하는 가치(이데올로기)를 담기에 가장 적절한 단어를 끊임없이 골라내고 있다. 그런데 '아내'의 가부장성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와이프(wife)'라는 단어 역시, 사실 그 뿌리를 파헤쳐 보면 서구의 유구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정동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외래어를 쓸 때 우리가 느끼는 세련됨이나 수평적 느낌은 어쩌면 그 단어의 진짜 역사(정통)를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착시이다. wife의 어원은 고대 게르만어 계열인 wība에서 왔다고 한다. 어떤 학자들은 이 단어가 ‘가리다’나 ‘베일을 쓰다’라는 뜻과 연결된다고 보는데 이는 여성을 공적 영역에서 분리해 가정 내의 사적 영역으로 숨기는 서구적 가부장제의 정동을 담고 있다. 여성의 역할을 집안일에 제한한다는 점에서 우리 말 ‘아내’와 크게 가치면에서 다르지 않다. 

  

위로부터 강요당했던 영어

 

영어에 대해 이러한 정동을 갖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1945년 9월 남한을 점령한 미군은 공용어를 영어로 한다는 포고령을 오로지 그들의 필요에서 발표했다. 미군정 포고령 제1호 5조에 나타나 있다. 남한의 건국 자체가 미국에 기댄 바가 컸다. 또한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으면서 미군이 개입하여 전황이 바뀐 경험 등, 미국은 한국에게 거역할 수 없는 존재로 각인되었다. 친일파를 비호하여 식민 찌꺼기가 많은 부분 그대로 남았다. 물론 경성제대의 언어학도 그 가운데 있다. 그 뒤로 서울대라는 권위를 업고 자꾸 번져갔다.

 미국에 공손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정동적 무의식이다. 공손하지 않으면 어떤 일을 당할지 몰라. 그것은 또한 세련됨과 동경의 대상이었고 성공과 권력으로 가는 열쇠였다. 긴 영어식 이름의 아파트, 기억하기도 쉽지 않은 영어식 회사 이름, 상품 이름이 쏟아지고 있다. 심지어는 땅이름까지 영어식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를테면 부산에서는 ‘에코델타동’이란 이름의 행정동을 만들려고 했다가 결국은 반대 여론에 꺾였다. 어떤 분은 ‘에코’에 ‘친환경’이란 뜻이 있고 ‘델타’에 삼각주란 뜻이 있어 그 지역에 가장 걸맞은 땅 이름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에코’는 그리스말 ‘오이코스’(살림, 가정)이란 뜻에서 왔고 ‘델타’도 삼각주란 뜻만 갖지는 않는다. 이 경우에도 영어의 본디 맥락에서 벗어나 제나름의 그 뜻을 매긴다. 외국어를 숭배하는 구조는 ‘와이프’를 들여오는 경우와 다름이 없다.

‘가람’이 ‘강’으로 변하고 ‘한밭’을 ‘대전’으로 바뀌는 이런 변화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세계 으뜸이라고 칭송받는 한글을 ‘언문’이라 천대하고 백성을 까막눈으로 만드는 한자는 ‘진서’라고 받들던 그 뒤틀린 심보의 뿌리도 이런 데에 있었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영어 숭배는 우리 사상사에서 보면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 사대 모화의 새로운 판이다. 뿌리깊은 천한 한국말, 천한 언문 의식이 그대로 남아 있다. ‘가람’이 변하여 ‘강’이 되었는데 이제 다시 ‘리버’가 되고, ‘바닷가’는 ‘해변’이 되었는데 요즘은 ‘비치’가 되었다. 이제 영도 ‘다리’는 사라지고 영도 ‘대교’만 남았는데 또 수영강에는 휴먼‘브리지’가 생겨나고 있다. ‘다리’도 아니고 ‘교’도 아니고 ‘브리지’다. 이것은 말수를 다양하고 풍부하게 함이 아니라 줏대 없음의 표현이다. 우리말에 대한 자부심을 찾아보기 힘든 우리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다.

 

에코델타동 소동. 출처: KBS 뉴스.2024.04.23

 

희망은 어디에

 

우리에게 역사란 그냥 과거에 대한 기억만으로 그치고 마는가. 산 역사가 되지 못하고 조각난 기억만으로는 역사가 될 수 없다.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낡은 통념을 없애야 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영어를 대하는 태도에 분명히 문제가 있어 보인다. 우리말과 글로도 고결하고 지성적인 작업을 할 수 있음을 보이고 학문과 문화가 가능함을 보여준다면 낡은 생각이 사라지지 않을까?

자기 비하가 체화된 우리는 “이번 프로젝트의 키 팩터를 체크하고 컨펌하세요”라는 말투에도 저항감을 느끼지 못한다. 어떤 이는 우리말·글로 학문과 문화를 세우는 과제가 너무 무겁게 느껴져 외면하고도 싶을 것이다. 이미 너무나 탁류가 도도하여 이런 작업이 부질없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다. 이런 현실을 무턱대고 받아들이자는 현실 순응적인 정동을 남한의 ‘과학적’ 언어학자들은 갖고 있다. 경성제대의 유산을 끔찍이 아끼면서 주시경과 조선어학회의 전통은 속 좁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라고 비난하고 있다. 민족주의는 억압이니 그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영어 숭배는 많은 사람들을 소외시킨다. 영어 잘 하는 사람과 잘 못하는 사람을 가른다. 그렇다고 누가 항의하지도 않는다. 모두 유식하게 보이고 우아하게 보이고 싶어 한다. 소통이 아니라 지배와 과시를 위한 언어를 절대시해서는 안 된다. 권위주의가 아닌 소통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이런 일을 빠뜨릴 수는 없다. 더구나 북한에서는 영어로 뒤범벅이 된 남한말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남한 현실은 하루빨리 화해하고 서로 손잡아야 할 북녘 동포들과 소통을 단절하고 거리감을 키운다. 함부로 쓰는 영어가 그 주요 원인이다. 옛날 차이나의 패권이 무너졌듯이 아메리카의 패권도 영원하지 않다. 민주주의와 통일도 가볍게 여기면서 우리말을 바르게 쓰자는 주장을 부당한 간섭으로 느끼는 정동은 어디에서 오는가.

 

순한글 <독립신문>. 출처: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