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사냥의 초국적 정동 경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신화적 죽음 정치
권두현 (연세대)
케이팝과 신화: ‘K’의 글로벌 유통과 인종화된 정동지리
케이팝은 이제 하나의 세계적 장르가 되었다. 우리는 흔히 그 성공을 한국적 창의성이나 산업적 완성도의 성과로 설명한다. 훈련된 신체와 고도화된 프로덕션, 플랫폼 유통이 맞물리며 케이팝은 전 세계에서 자연스럽게 소비된다.
그렇다면 왜 케이팝의 리듬과 몸짓은 세계 어디에서나 자연스럽게 즐길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질까? 이 문제의식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2025)에서 더 선명해진다. 세계적 걸그룹이 무대 위에서는 아이돌로, 무대 뒤에서는 악마 사냥꾼으로 활동한다는 설정은 겉보기엔 K-판타지이다. 그렇지만 정동의 토대는 한국의 신화적 전통만으로 설명되기 어렵다. 오히려 선과 악의 이분법, 타자의 악마화, 제거와 정화의 쾌감, 집단적 구원 서사 같은 요소들은 북미, 더 정확히는 부유한 북반부에서 오래 축적되어 온 ‘사냥’의 정동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사냥의 감각은 노예제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추적·포획·제거의 정동적 유산과도 닿아 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특히 이 작품이 북미의 한국계 창작자들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한국 문화의 수출이라기보다, 이미 세계 시장 속에서 유통되고 탈맥락화된 케이팝이 글로벌 노스의 정동 질서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다시 신화화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노예제의 사후생: 노예제의 유산과 글로벌 전이
사이디야 하트먼이 『예속의 장면들: 19세기 아메리카에서의 공포와 노예제, 자아 만들기』(1997)에서 제시한 노예제의 사후생은 케이팝이 세계로 유통될 때 함께 따라붙는 감각의 조건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핵심 개념이다. 노예제는 과거의 제도로 끝난 것이 아니라, 자유·계약·선택·책임 같은 자유주의의 언어 속에서 다른 형태로 계속 살아남았다. 노골적 강제 대신 계약과 채무, 자기 책임의 문법이 예속을 합법적이고 지속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폭력은 오락적 재현의 형식으로 번역되어 일상화된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진우 서사는 이 논리를 압축한다. 가난한 악사였던 진우는 가족을 부양하려고 악마 귀마와 계약을 맺는다. 겉보기엔 자발적 선택이고, 선택에는 보상이 따른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는 악령이 되어 400년 동안 예속되고, 기억과 감각을 통제당한다. 계약이 자유의 언어로 포장될수록, 실제로는 채무와 처벌을 통해 예속을 연장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는 점, 즉 선택이 예속을 감추는 방식임이 선명해진다.
하트먼이 던지는 더 불편한 통찰은, 예속이 법률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예속은 감각과 재현의 규칙을 조직하는 폭력이고, 폭력은 공포와 향유가 결합한 형태로 오래 지속될 수 있다. 폭력이 볼거리가 되는 순간, 폭력은 사라지기보다 더 사회적으로 안정된 형태로 남는다.
리사 로우의 『4대륙의 친밀성』(2015)은 위와 같은 구조를 더 큰 지도로 확장한다. 근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는 유럽 내부의 성취만은 아니다. 아프리카 노예제를 포함하는 아메리카 식민주의와 아시아의 노동과 무역이 엮인 네트워크 속에서 가능했다. 로우가 말하는 제국적 재할당 노동 전략은 노골적 강제가 흔들릴 때 제국이 계약이라는 외피로 노동을 재배치하며 예속을 새 형태로 갱신해 왔음을 보여준다. 노예제 이후는 단절이 아니라 변형의 연속이었다.
이 관점에서 진우의 노예 계약은 판타지적 설정 이상의 함의를 갖는다. 노예제의 폭력은 폐지 이후에도 계약, 이주, 인종적 표식의 변화 속에서 다른 집단의 신체와 노동으로 전이되어 접속해 왔다. 그리고 오늘날 이 재배치는 정동의 차원에서 한 번 더 작동한다. 과거 제국이 아시아적 신체를 ‘노동하는 몸’으로 재할당했다면, 현대 글로벌 자본주의는 그 신체를 점점 더 ‘쾌락을 생산하는 몸’, 즉 정동을 생산하는 몸으로 재규정한다. 그래서 케이팝 속 ‘코리안’의 신체는 전 지구적 시장이 소비할 보편적 쾌락과 안전한 정동을 생산하도록 재배치된 고도의 공연인으로 기능한다.
결국 진우의 비극은 ‘악마에게 영혼을 판 이야기’가 아니라, 고통과 기억을 통제당한 채 타인의 안녕과 승리를 위해 끝없이 퍼포먼스를 수행해야 하는 ‘연예라는 이름의 사후생’을 형상화한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노예제의 사후생이 오늘날 어떤 감각과 어떤 산업의 언어로 갱신되는지를, 진우의 서사를 통해 눈앞에 세운다.

톱시와 집 쿤, 진우와 루미: 탈맥락화하는 케이팝, 재맥락화되는 케이팝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정동적 인프라와 노예제의 사후생이란 시선으로 보면, 케이팝의 새로움 뒤에서 오래된 계보가 떠오른다. 19세기 미국 대중문화가 민스트럴 쇼에서 흑인성을 오락의 문법 속에 묶어두기 위해 만든 톱시와 집 쿤이다.
야생적이고 비도덕적인 톱시는 폭력과 착취를 정면으로 드러내기보다, 그것을 장난스럽고 통제 불가능한 웃음 속에 흡수해 무화시키는 표상이었고, 화려한 옷차림의 집 쿤은 흑인이 사회적 상승을 욕망하는 순간을 희화화하고 처벌하는 표상이었다. 방식은 다르지만 둘 다 흑인 신체의 대체 가능성—물건처럼, 동물처럼, 또는 타인의 자아 성찰을 위한 도구처럼 전용될 가능성—을 오락의 규칙으로 가공해 폭력과 향유를 결합시키는 장치였다.
이 계보는 작품 속 진우와 루미에서 다시 변주된다. 진우는 자유와 성공을 갈망하지만, 계약이라는 장치를 통해 예속과 처벌의 구조로 되돌아온다. 선택의 언어가 예속을 감추는 방식이 여기서 반복되며, 제자리를 벗어나려는 욕망이 좌절되는 집 쿤의 처벌적 서사와 공명한다. 한편 인간과 악마의 혼혈인 루미는 경계적 신체로서, 그의 불안과 상처는 관객이 쉽게 따라갈 수 있는 보편적 감정 드라마로 번역된다. 낯선 고통이 친숙한 감정 상품으로 정리되는 순간이다.
문제는 고통이 드러난다는 사실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보이게 되는지에 있다. 케이팝 아이돌이라는 정제된 신체를 통해 드러나는 고통은 역사적·정치적 특수성이 붙잡히기 전에 관객이 소비 가능한 감정으로 탈맥락화된다. 그리고 그 감정은 ‘신화/구마’라는 세계관 속에서 인류애나 영웅 서사로 재맥락화된다. 결국 케이팝은 흑인성에 접착되어 있던 저항과 고통의 감각을 떼어내, 인종적 표지가 지워진 아이돌의 신체에 재조립하며 보편적 향락을 생산한다.
그렇다면 왜 케이팝 아이돌의 신체, 특히 아시아인의 신체가 과거 흑인 연예가 담당해 온 리듬과 수행성, 고통의 드라마를 대체할 수 있는 위치에 놓였을까. 이는 단순한 차용이 아니라, 글로벌 플랫폼 환경이 요구하는 안전한 감정의 규범과 관련된다. 흑인 신체가 역사적으로 수행해 온 과잉성, 위험성, 통제 불가능성은 강력한 쾌락의 자원이지만, 동시에 오늘날에는 ‘과도한 정치성’으로 취급될 위험도 있다. 이 지점에서 케이팝 아이돌의 몸은 같은 정동을 더 관리 가능하고 보편화가 가능한 형태로 재포장하는 매개가 된다.
그래서 예속과 고통의 감각은 사라지지 않은 채 형태를 바꿔 이동한다. 진우가 400년 전의 악사와 현대의 아이돌을 오가며 고통을 반복 수행하는 설정은, 19세기 민스트럴 무대에서 조직되었던 톱시와 집 쿤이 구성한 쾌락의 문법이 21세기 글로벌 플랫폼에서 ‘K’라는 기호로 갱신되는 장면을 압축한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이 탈맥락화와 재맥락화의 연쇄를, 인물들의 비극과 성장담 속에 촘촘히 접어 넣는다.

구마의 서사와 노예제의 정동 경제: <케이팝 데몬 헌터스>라는 사례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케이팝의 화려함을 찬양하면서도 그 화려함이 성립하는 조건, 즉 고통이 어떻게 감정으로 가공되고, 감정이 어떻게 안전한 쾌락으로 유통되는지를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런 정동의 배치는 무엇에 의해 가능해지는가. 이 질문은 작품의 최종 악으로 설정된 귀마를 다시 보게 만든다.
귀마는 한국의 신화적 존재처럼 보이지만, 더 결정적인 것은 그가 수행하는 권력의 형식이다. 귀마는 직접 고통받지도, 직접 몸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대신 계약을 통해 타인의 신체를 관리하고, 위험과 고통,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쾌락의 수행을 타자에게 위임한다. 폭력을 전면에 드러내기보다 선택과 보상의 언어를 앞세우는 이 구조는, 계약을 통한 예속이 서사적으로 재가동되는 순간이다. 따라서 귀마는 특정 인종을 사실적으로 재현한다기보다, 글로벌 자본주의 속에서 백인성이 작동해 온 권력의 문법, 즉 보이지 않는 통제를 통해 예속을 관리하고 고통의 수행을 타자에게 대리시키는 방식이 응축된 알레고리로 읽을 수 있다.
이 권력은 고통을 필요한 것처럼 작동하도록 세계 자체를 설계한다. 그 결과 폭력은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신화와 계약, 사명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 일상적 조건이 된다. 그리고 고통은 구조를 묻는 정치적 질문으로 확장되기보다, 영웅 서사 안에서 안전하게 감상할 수 있는 감정으로 정리되며 봉합된다.
여기서 작품이 택한, 귀신을 쫓아내는 구마 장치는 이 봉합을 가장 매끈하게 만든다. 아이돌의 무대는 악령과의 전쟁터로, 퍼포먼스는 악을 몰아내는 마법으로 전환된다. 폭력의 원인은 법·노동·차별 같은 사회구조가 아니라 외부의 악으로 돌려지고, 폭력은 반복되는 조건이 아니라 제거하면 끝나는 사건처럼 보인다. 관객은 비극의 토대를 묻기보다 정화의 순간에 동참하게 된다.
사라 아메드의 정동 경제 관점에서 보면, 작품은 감정을 특정 대상에 정밀하게 부착한다. 공포와 적대감은 악령에게, 환호와 애정은 아이돌에게 붙고, 관객의 감정은 그 경로를 따라 움직인다. 결국 폭력은 나쁜 대상이 제거되는 통쾌함으로 소비되고, 구마 서사는 그 소비를 효율적으로 조직하는 정동적 장치가 된다.
여기에 유통과 참여가 결합하면 이 장치는 화면 밖에서도 이어진다. 싱어롱 버전, 팬덤 상연회처럼 관객의 참여를 촉진하는 장면에서, 서사 속 전쟁은 현실의 극장에서 집단적 유희로 재연된다. 이때 감상주의는 공감의 이름으로 작동하지만, 고통의 정치적 맥락을 묻기보다 나는 충분히 느꼈다는 자기확인으로 기울기 쉽다.
루미의 결말은 이 모든 과정이 어떤 신체를 요구하는지까지 드러낸다. 사람과 악마의 피가 섞인 경계적 존재인 루미는 기원을 숨기고 아이돌로서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조절을 수행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진우는 루미를 대신해 귀마의 공격을 온몸으로 막아내고, 자신의 배신을 뉘우치며 혼을 루미의 사인검에 넘긴 채 소멸한다. 오래된 예속의 기억과 과잉의 감정을 짊어진 신체가 스스로 사라지며, 그 힘과 잔여를 보편성의 형식으로 가공된 아이돌의 몸에 이양하는 의식처럼 작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우의 소멸은, 노예제의 사후생이 남긴 감각의 잔여, ‘흑인성’이라 부를 수 있는 과잉과 위험의 흔적이 지워진 자리에 더 매끈하고 더 관리 가능한 케이팝 신체가 서는 순간을 알레고리로 만든다. 이것은 케이팝이 힙합의 리듬과 수행성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면서도 그 문화가 품고 있던 인종적 역사성과 정치적 긴장을 점차 지워온 과정과도 겹쳐 보인다. 결국 루미는 위험한 과잉을 제거한 뒤 글로벌 시장에서 완전히 관리 가능한 신체로 재탄생하는 장면을 형상화하고, 귀마와 구마 서사는 그 변환을 가능하게 하는 권력의 자리와 서사 형식으로 남는다.

노예제의 아카이브와 공감의 죽음정치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보여주는 것은 단지 구마 서사가 아니다. 이 작품은 고통을 정화의 쾌감으로 정리하고, 안전한 정동으로 유통가능한 형태로 재배치하는 방식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과정은 작품 안에서 멈추지 않는다. 플랫폼에 올라가는 순간, 고통은 다시 번역되고, 더 빠른 속도로 순환한다.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플랫폼은 과거의 고통을 단순히 저장하는 아카이브가 아니다. 오히려 플랫폼은 고통을 접근가능한 감동, 공유가능한 이야기로 번역해 전 지구적으로 재배분하는 정동적 아카이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실의 정확성보다 감정의 순환이다. 누군가의 고통은 볼 수 있는 장면이 되고, 함께 느낄 수 있는 이야기가 되며, ‘함께 따라 할 수 있는 체험’으로 바뀐다. 그렇게 번역된 고통은 추천 알고리즘과 참여 문법을 타고 더 빠르게 확산된다.
이 과정에서 노예제의 사후생도 형태를 바꾸어 재가동된다. 작품 속 계약이 진우의 예속을 개인의 선택과 책임으로 환원했듯, 플랫폼 자본주의는 구조적 착취를 개인의 성취 서사나 비극적 성장담으로 포장해 유통한다. 고통은 구조가 아니라 캐릭터의 운명이 되고, 예속은 시스템이 아니라 개인의 결단이 된다. 그 결과 질문은 “왜 이런 구조가 가능한가”에서 “얼마나 가슴 아픈가”로 게 이동한다.
여기서 공감은 언제나 선의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눈물과 감동이 고통의 원인을 묻는 질문을 대신할 때, 공감은 비판의 출발점이 아니라 봉합의 장치가 된다. 타자의 고통이 내 감정의 고양을 위한 도구로 소비될 때, 공감은 함께 느꼈다는 사실을 면죄부처럼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죽음 정치라는 문제의식이 중요해진다. 아쉴 음벰베의 책 『죽음정치 - 증오의 정치에 관하여』는 전쟁 같은 노골적 폭력만이 아니라, 어떤 집단이 더 쉽게 소모되는 삶이 되고, 더 쉽게 방치되는 죽음이 되는지를 배치하는 질서를 드러낸다. 특히 식민주의적이고 인종화된 맥락을 중시한다. 문화 산업의 감정 체계 속에서도 누가 죽어도 되는가는 조용히 결정된다. 오늘날의 죽음 정치는 주권자의 선언만이 아니라, 공감과 감동이 폭력을 감상적이고 소비가능한 것으로 바꾸는 방식으로도 재생산될 수 있다.
결국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무엇이 폭력인가”를 넘어선다. 더 결정적인 것은 우리가 어떤 감정의 형식으로 폭력에 연루되는가다. 고통을 느끼게 하는 장치가 고통을 묻지 않게 만드는 장치가 될 때, 정동적 아카이브는 공감의 이름으로 죽음 정치의 질서를 업데이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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