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가사노동 재현의 역사
김충국 (수이제)
공식적으로 영화는 1895년에 탄생했으니까 올해 130살을 맞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세월 동안 역대 최고의 영화가 무엇이냐는 논쟁 역시 족히 100년은 된 듯하다. 이때 우리는 ‘권위 있는 의견’에 의존하게 되는데, 그 권위를 가진 잡지 중에 하나가 <사이트 앤 사운드>라는 잡지다. 이 잡지는 기간과 규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권위를 가지고 있다. 10년에 한 번씩 세계 1,600여 명의 전문가로부터 투표를 받아 250등까지 순위를 발표한다. 가장 최근의 발표가 2022년에 이루어졌으니 다음 발표는 2032년에야 나올 터이다.
2022년 발표된 순위에서 2등부터 5등까지를 보자. 히치콕의 <현기증>,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 왕가위의 <화양연화>가 그 안에 들어 있다. 저 쟁쟁한 작품들을 제친 1등은? 샹탈 아케르만이라는 생소한 감독이 1975년에 만든, <잔느 딜망>이라는 생소한 영화다. 전문가들에게는 알려진 영화이지만 대중에겐 낯선 영화다. 그래도 명색이 세계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인데 인지도가 너무 바닥이다. 그럴 만한 것이, 이 영화를 끝까지 봐달라고 아무리 호소해 봤자 대부분은 30분 이상 보기 힘들 거다.
영화 역사상 ‘최고의 영화’, <잔느 딜망>

잔느 딜망이라는 여자가 있다. 남편은 없고 10대 중후반쯤 돼 보이는 아들과 산다. 특별한 기술이나 재주가 없다 보니 집에서 매춘을 하거나 이웃집 아기를 돌봐주면서 생계를 꾸린다. 먹고 살기 팍팍하니 특별한 취미나 여가 활동도 없다.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하루종일 집에서 밥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청소한다. 소일거리라곤 털실로 스웨터 짜고 편지 읽고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부리는 게 전부다.
정해진 시간에 늘 같은 경로로 외출을 나가긴 하는데, 우체국과 카페를 들르고, 시장에서 생필품을 산다. 그런 엄마 밑에서 사는 아들 역시 별 볼 일 없긴 매한가지다. 관객은 그 똑같은 일과를 장장 세 시간이 넘게 지켜봐야 한다. 그러니 아무도 이 영화를 보려고 할 리가 없다.
아무도 보려고 하지 않는 영화. 이 영화의 위대함은 바로 그 사실에 있다. 저 주인공의 삶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 중 절반, 그리고 그 절반의 거의 대부분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모든 인구 절반의 무게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존재론적 질량으로 따지자면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영화다. 그리고 세상의 대부분 여성과 가장 닮아있다는 점에서 영화 역사상 가장 보편적인 영화이며, 가장 현실과 흡사한 영화다. 너무 보편적이고 너무 현실적이다 보니 아무도 관심을 가지고 보려 들지 않는 것이다. 세상의 지독한 무관심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 영화는 내용뿐 아니라 상태적으로도 여성의 존재 형식과 닮아 있다.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
이쯤에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언제부터 여성의 삶은 무관심한 대상이 되었을까? 그런데 조금만 뒤적거려보면 남성 중심 사회는 인류 전체의 역사에서 보면 최근의 일이고, 그 이전의 매우 오랜 기간 동안 인간은 모계 사회를 영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 남녀의 신분이 회복 불가능하게 뒤집어져버린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하여 엥겔스는 매우 멋진 작명을 해냈다. 이름하여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다. 저 명칭은 멋질 뿐만 아니라, 사건의 성격을 너무나도 풍부하게 함축하고 있어서 인류 최고의 작명이라 할 만하다. 물론 다들 잘 아시다시피 엥겔스는 공산주의자고, 그러다 보니 모든 문제를 계급 문제로 바라본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여성의 지위 하락은 사적 소유, 사회계급, 국가의 출현과 유기적으로 관계된 사회적 조건의 역사적 변화의 산물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1884)
우리가 아무리 투철한 반공정신으로 ‘계몽’되어 있더라도 저 빨갱이의 말씀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긴 쉽지 않은 것이, 농경사회의 도래가 사회를 남성 중심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이론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농경문화는 사적 소유, 계급, 국가의 등장 또는 확립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라는 저 힘차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을 하나씩 뜯어보자. 우선 ‘세계사적’이라 함은 전면적이면서도 심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세계사적 사건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관계를 비역사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이다. 그러니까 세계사적이라 함은 역사를 몰각시킬 만한 것이어야 한다. 근대 제국주의의 도래가 식민지배를 식민지 사람들을 본성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모두에게(심지어 식민지 사람들에게까지!) 전면적으로 각인시켰다는 점에서 세계사적 사건이듯이, 남녀의 권리 역전 역시 그러하다.
가사노동은 부불노동이라는 운명 때문에 노동으로 인식되기보다는 타고난 자질에서 비롯된 행위로 탈바꿈했다.
-실비아 페데리치, 『혁명의 영점』(2012)
농경사회의 도래 이후 새로이 형성된 성별 분업에 의해 직접적으로 재화를 생산하지 않는(그래서 식구들에게 유세 부릴 수 없는) 가사노동은 그 ‘비경제성’ 때문에 부불노동, 즉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노동으로서 여성의 몫이되었는데, 이것이 세계사적 사건인 이유는 잡다한 집안일들이 본성적으로 여성에게 적합한 일이라는 몰역사적 규정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패배’라는 표현에도 주목하자. 라틴어 경구 “바에 빅티스(패자에겐 비참함뿐이다)”처럼, 패자에겐 국물도 없는 법이다. 더구나 보편적 관철이라는 의미에서의 세계사적 패배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어느 사회학자님께서는 이런 아름다운 예를 드셨다.
부르주아의 아내를 부르주아라고 부르는 것은 플랜테이션 농장주의 노예를 농장주라고 부르는 것과 다름없다.
-크리스틴 델피, 『주적』(1970)
1950년대 부부의 풍경, <자유부인>

사실이 그렇다. 돈 낼 가치도 없는 노동을 하는 여성은 집안에서는 사실상 노예 신세다. 평생 남편의 경제력에만 의존하던 여성이 무일푼으로 혼자 남게 되었을 때 어떤 신세가 될지 1초만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온다. <잔느 딜망>에서 암시되듯이, 그녀도 남편이 있을 때는 꽤나 교양 있게 살았던 사람이었던 듯싶다. 남편 계급장이 아내들 사회에서도 따라붙는다는 이야기는 군인아파트 부녀회의 미풍양속일 뿐, 집구석에서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장군님댁 부부가 싸운다고 별들의 전쟁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여성의 재산권에 관한 법적 인식이 확산되기 전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전쟁 후 변화한 새로운 성도덕을 다뤘다고 해서 관객들을 긁어모았던 <자유부인>(한형모, 1956)을 보자. 대학교수를 남편으로 둔 유부녀가 바람피우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첫 장면부터 매우 기괴하다. 남편은 신문에 코를 박고 앉았고 아내는 다림질을 하고 있다. 옆에서 숙제를 하던 아들이 질문을 하는데, 남편은 글을 써야 한다며 아내에게 떠넘기고 나가버린다. 아들의 지적 호기심 덕분에 글을 쓰게 된 교수는 자신의 집필 동기가 마뜩잖았던지 옆집의 전축 소리에도 예민해져 버린다. 그는 자신의 심적 상태에서 기인한 이웃 간 갈등까지도 아내를 불러다가 해결한다.
어찌어찌하여 아내는 바람이 나는데 남편 역시 그에 못지않다. 영화를 자세히 보면 남편이 맞바람으로까지 진도를 빼지 못한 것은 그의 윤리의식 때문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는 여제자의 자제력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그래 놓고선 남편은 그 결과적 윤리로 아내를 심판할 지위를 얻게 된다. 아내랑 아들이 울고불고하는데 뒤에서 판사처럼 서 있는 남편의 모습은 소름이 끼칠 정도다.
정말 기괴한 것은, 남자의 저 기괴함에 대해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에서 아내의 외도는 그 이유를 관객에게 직접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마치 그녀의 본성인 것처럼 보인다. 다림질을 하면서 아이 공부를 봐줘야 하고, 남편의 예민한 청각을 보필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교수는 아내의 불륜에 대해 눈꼽만큼의 자기반성도 필요치 않은 것이다.
식모는 누굴 위해 일하는가

고도성장으로 인한 도농 간 불균형 발전은 가사노동의 획기적 변화를 낳았는데, 식모의 등장이 그것이다. 물론 식모는 전통사회부터 이미 존재했지만 60년대부터는 소위 ‘중산층’에서도 식모를 두는 집이 많아졌다. 당시 우리나라가 세계 최빈국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중산층의 삶이라는 것도 사실 대단한 것은 못 된다. 농촌에서 상경한 어린 여성들을 밥만 먹여주면 월급을 주지 않고도 식모로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식모가 있다고 해서 주인마님의 삶이 크게 달라지는 건 아니었는지라 식모로 얻은 여가시간에 뭐라도 가정경제에 도움 되는 일을 해야 했다. 그래서 식모 문화가 정착되기 이전의 영화 <하녀>(김기영, 1960)의 주인마님은 만삭의 몸인데도 쉬지 않고 재봉틀을 돌려야 했다. 사람들은 이 영화의 가족을 ‘중산층’이라 규정하는데, 그 시대에 피아노와 텔레비전을 갖춘 집이 과연 얼마나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면 그들은 분명 상류층이다. 돈이 엄청 많지는 않지만 소위 ‘문화자본’만큼은 최상류층이다.
그땐 상류층도 여성만은 피곤했다. 거기에 집에서 남편을 보필하는 젊은 여자의 등장이라니. 신체적 피로의 감소만큼 정신적 스트레스가 증가한 셈이다. 이렇게 식모는 여성 복지를 위한 풍습은 아니었다. 그래서 실비아 페데리치는 앞에서 언급한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본은 여성이 남성노동자의 노동과 임금에 의존하게 만듦으로써 남성노동자 역시 통제했다. 그리고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과중한 업무에 시달린 뒤 집에 가면 부릴 수 있는 하녀를 붙여줌으로써 이 통제에 순응하게 만들었다.
-실비아 페데리치, 『혁명의 영점』(2012)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의 ‘그릇 이론’

주인마님이 식모에 공연히 속앓이하는 동안, 도시의 남성 영화 관객들은 식모에 대한 새로운 판타지를 창조했다. 소위 ‘호스티스 멜로드라마’라는 장르인데, 이것은 원래 사회비판적 측면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고도성장사회의 그늘을 비판하는 리얼리즘 소설 『영자의 전성시대』가 1975년에 동명 영화로 만들어졌다.
무작정 상경해서 식모→공장노동자→버스 차장을 거치며 도시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다가 못된 남자 만나 몸 버리고 결국 술집에 흘러 들어가 파멸한다는 이야기다. 저 경로에서 술집만 빼면 당시 상경 여성의 일반적인 구직 경로와 거의 일치하므로 충분한 시사성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관객이 주목한 것은, 순진한 여성이 술집 여자로 나가떨어지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성 편력과, 새롭게 등장한 향락문화라는 구경거리였다.
이후 유사한 영화가 쏟아졌고 주인공은 여대생 등으로 다채로워졌다. 시골 소녀든 여대생이든 공통적인 것은 아버지의 통제를 벗어난 여성이라는 점인데 ‘그릇과 여자는 밖으로 내돌리면 금이 간다’는 무시무시한 교훈적 이론을 담은 이 장르는 70년대 중후반을 풍미하였다.
호스티스 멜로드라마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바깥일 하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무의식적 공포를 담고 있다. 여성에 대한 통제 불가능성과 잠재적 라이벌 의식이 낳은 공포는 여성을 혐오의 대상으로 바라보도록 추동한다. 저런 여자를 파멸시키는 영화들은 위기의 남성에게 상당한 위로가 되었다.
영화 <해피 엔드>에 담긴 가사노동의 본질

세월이 흘러 IMF 사태가 터졌고 그것은 전통적인 가부장 체제에 치명타를 안겼다. 세월이 흘렀는지라 세기말의 가부장은 당위와 윤리가 아닌 경제력이었는데, 그게 날아가 버린 것이다. 무너진 경제를 일으키고자 여성들이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고, 그녀들의 능력은 종종 남성을 초월했다.
영화 <해피 엔드>(정지우, 1999)는 이 새로운 세상의 지옥도였다. 이 영화의 남편은 회사에서 짤린 후 직업을 구하며 가사노동을 맡고 있는데, 역사적으로 남성이 관철해 온 의도적인 ‘생물학적’ 진화 노력이 무색하게도 이 남편은 가사노동이 체질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아내는 사교육 시장에서 성공한 실력자다. 이렇게 바뀐 성역할에 만족하며 오순도순 살아가면 참 좋으련만, 밖으로 나돌던 아내가 바람이 나버린다. 경제적 지배력에 성적 지배력까지 훼손당해 꼴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남편은 아내를 죽인다. 그리고 내연남이 살해한 것으로 일을 꾸미는데,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악마적 완전범죄다.
줄거리로는 저렇지만, 사실 이 영화는 구식 한국영화처럼 ‘여성배우는 벗고 남성관객은 즐기는’ 단순한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는 공평하게도 남편만큼이나 아내의 내면에도 초점을 부여하기 때문에 ‘남편 손에 죽어 마땅한 년’이라고 단정하기가 쉽지 않다. 아내와 남편은 서로의 피해자다. 그래서 이야기는 성차별적인데도 정서는 양성적인, 매우 풍부한 감성의 영화다.
그리고 이 영화엔 가사노동의 기원적 본질이 함축되어 있기도 하다. 아내가 바람난 것을 남편이 눈치챘다는 사실을 아내가 눈치챈 후 벌어지는 일들을 보자. 기막히게 놀라운 정상화가 실현된다. 아내는 여전히 밖에서 돈을 벌어오지만, 집에 와선 밥도 하고 청소도 하고 애도 돌보고 상냥해진다. 윤리적 주도권을 장악한 남편은 퇴근한 아내가 주방에서 또 일하는 동안 맥주를 마시며 텔레비전이나 보고 앉았다.
이 엄청난 불평등에 이의 제기가 불가능한 것은, 그 불쌍한 아내는 가사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벌을 받으며 속죄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에덴동산 사건 이래, 출산, 육아, 가사노동은 여성의 징벌이었다. 그래서 회복된 가정의 풍경 안에는 가사노동에 담긴 본원적 성격의 회복까지도 담겨 있는 셈이다.
가사노동의 은폐된 역사를 감각하기
여성의 자질이 가사노동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증명되자 사람들은 전통보다는 경제를 선택하여 맞벌이가 제공하는 두 배의 소득을 탐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가사노동 분담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 모두가 느끼다시피 이 문제는 부부 갈등의 핵심 주제다.
남성들은 이미 가사노동에 관한 유전적 형질이 상실되어 버린 듯하여 아무리 평등 이념으로 무장한 남성이라도 실천에는 한계를 보이기 십상이다. 인류 역사상 이념으로 가장 똘똘 뭉친 집단이었던 볼셰비키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레닌은 어느 문건에서 다음과 같은 푸념을 털어놓았다.
우리 동지 가운데, 안타깝게도 많은 이가 다음 문장에 해당한다. ‘공산주의자들을 조금 긁어내면 그 안의 속물을 만나게 될 것이다.’ . .. 여자들이 자신의 시간과 노동력을 잡아먹는 단조롭고 극도로 피로한 노동인 집안일을 하느라고 스스로를 혹사하는 걸 남자들이 팔자 좋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 가장 명백한 증거이지 않겠는가.
-클라라 체트킨, 『레닌의 여성문제론』(1925)
그러면 여성의 가사노동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인가. 역사적으로 은폐된 그 착취 구조를 감지할 도덕적 신경망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영화 <잔느 딜망>의 마지막 장면은 충격적이다. 세 시간을 넘도록 그 지루하고 반복적인 가사노동을 지켜보던 관객으로서는 어안이 벙벙해질 뿐인데, 주인공의 행위 동기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매우 자세히 보면 얼핏 소소한 단서들이 짚이긴 한다.
하지만 그걸 찾아보겠다고 다시 세 시간을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저 영화가 ‘가정에서의 여성’이라는 일반적 구조에 대한 환유라는 점만 상기하자. 그 행동이 범죄라는 건 유치원생도 다 알고 있으니 하나마나한 소리는 하지 말자. 끊어낼 수 없는 숙명적 형벌과도 같은 가사노동이라는 굴레로부터 탈옥하는 방법이라는 게 고작 저거 말고 뭐가 있겠는가. 침묵과 무관심으로 둘러싸인 채 사그라져가는 한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자발적 소멸 외에 뭐가 있겠는가.
만약 그 영화에서 여성을 역사적 차원에서 감지하는 듯한 기분이 잠시나마 스쳐 지나갔다면, 그 영화는 어느 영화도 못 해낸 위대한 일을 해낸 셈이다. 그걸 느낀 사람에게 저 영화는 130년의 영화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영화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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