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시간이 머문 하루의 기억
최현실 (동국대)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영원과 하루>는 죽음을 앞둔 한 시인(알렉산드로스)의 내적 여정을 통해 시간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촉발한 영화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이 영화는 그리스의 국경 지역을 배경으로 펼쳐져서 ‘국경 3부작’으로도 불리지만, 그의 영화를 평가하는 이들에게서 “정치적인 영화를 버리고, 역사적 상황을 인간관계로 전경화하고 내면의 갈등을 시각화하기 위한 조건으로만 사용하였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영화학자 브라시다스 카랄리스는 “앙겔로풀로스의 영화 재료는 주로 그리스와 관련된 것이긴 했지만, 그것을 프레임에 담고 시각화, 개념화하는 방식은 초국가적이고 보편적이며, 순전히 영화적이다”라고 평하였는데 이 영화가 지닌 예술성을 잘 나타낸 표현이다.
<영원과 하루>에서 과거가 제시되는 방식은 19세기 시인 디오니소스 솔로모스가 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주고 시어를 모으는 기억과 알렉산더의 내적인(시를 쓰는 일에만 몰두하여 딸 카트리나의 탄생을 축하하러 친지들이 집으로 찾아온 1966년 9월 20일에도 그의 사랑을 갈구하는 아내 안나에게 무심한 태도를 보이는) 기억이 현재 속에 ‘공존’하며 배열되고 있다. 반복되는 그날의 기억은 “이유를 명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괴로움에 가까운 불협화음”으로 시각적, 청각적인 시간으로 구현되고 있다.

또한, 이 영화에서 병으로 죽음을 앞둔 알렉산드로스가 마지막 하루 동안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만남, 미완의 언어를 되새기는 장면들은, 죽음을 지평으로 한 시간성의 체험을 영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객관적 시간’과 구분되는 알렉산드로스의 ‘주관적 시간(심리적 시간)’을 영화적 언어인 ‘기억(과거의 현재)’, ‘직관(현재의 현재)’, ‘기다림(미래의 현재)’이라는 “세 겹의 현재”를 느린 롱테이크와 정지된 듯한 카메라 움직임으로 따라가면서 삶의 덧없음과 동시에 충만함을 표현하였다. 이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개념에서 인간 존재가 ‘과거-현재-미래’의 선형적 흐름이 아닌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의 시간성 속에 놓여 있듯이, 관객이 알렉산드로스의 짧디짧은 하루가 곧 영원을 품을 수 있다는 역설을 받아들이게 한다.

이 영화에서 알렉산드로스의 하루 여정을 구성하는 중요한 축은 거리에서 자동차 창문을 닦다가 경찰에게 쫓길 위기에 처한 알바니아 소년을 구해주면서 시작된다.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인신매매단에 잡혀간 소년을 구출해주며, 소년을 국경 너머 알바니아로 돌려보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끝내 알렉산드로스는 소년을 돌려보내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의지하게 된다. 소년에게 다른 난민 친구들과 함께 또 다른 국경을 넘기 전까지 자신과 함께 있어달라고 부탁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알렉산드로스는 해변에 서서 소년이 알려준 ‘코르플라무(작은 꽃: 엄마 품에 안겨 잠든 아이의 평화와 안도)’, ‘제니티스(이방인: 추방자, 고향을 잃은자의 감정)’, ‘아르가디니(너무 늦었다: 때늦은 깨달음, 영화의 결말에 담긴 감정)’라는 시어들을 외친다. 이 세 단어의 상징 관계는 각각 관계적 차원에서 알렉산드로스가 삶 속에서 누렸던 타자와의 친밀성을 상징하고, 실존적 차원에선 그가 끊임없이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왔음을 드러내며, 시간적 차원에선 인간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죽음의 불가역성을 표상한다.
즉, 소년이 채집해 온 세 개의 단어는 알렉산드로스의 인생 행로와 삶을 관계·실존·시간이라는 세 축으로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언어는 단순한 기호나 표현 수단이 아니다. 언어는 정체성과 기억을 담는 그릇으로 영화에서 실존의 본질을 응축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알렉산드로스는 평생 미완의 시와 잃어버린 단어를 붙잡으려 하지만, 결국 소년(타자)과의 만남 속에서 의미를 되찾았다. 이는 앙겔로풀로스가 알렉산드로스의 하루는 단순한 개인의 끝이 아니라, 타자를 통해 이어지는 또 다른 영원의 시작임을 보여준 것으로 삶과 예술이 타자를 통해서만 새롭게 이어질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한편, <영원과 하루>의 음향은 종소리와 바흐의 음악과 전통적인 그리스 선율과 함께 시간성과 정제된 우울성으로 구성되었다. 이 영화에서 울린 세 번의 종소리는, 첫 번째, 항구 주변을 걷는 알렉산더가 건너편에서 똑같은 음악으로 화답하는 이웃의 이야기가 나오는 장면, 두 번째, 길거리에서 소년을 찾아다니는 장면, 세 번째, 죽음을 앞둔 노쇠한 어머니를 찾아가는 장면에서 나온다. 이 세 종소리는 ‘하루’의 시간성을 만들어 내며 알렉산더를 둘러싼 중요한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바흐의 선율이 흐르는 장면에선 시각적 움직임이 정지되는 순간 관객은 순수한 시간의 울림을 소리로 체험하게 된다. 종소리와 바흐 음악, 그리스 전통 선율에 나타나는 우울은 절망이 아니라, 삶의 덧없음을 직시한 후에 얻어지는 고요한 수용에 가까워서 관객은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죽음을 준비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삶의 풍요로움과 존재의 무게를 새삼 체험하게 된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역사의 거대한 비극과 개인의 고통을 넘어서, 죽음을 마주하는 인간 존재가 어떻게 언어와 타자 속에서 새로운 영원을 창출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는 무엇을 붙잡을 것인가? 언어와 기억,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어떤 영원을 발견할 수 있는가? 앙겔로풀로스의 <영원과 하루>는 단순한 영화가 아니라, 삶과 죽음, 개인과 역사, 언어와 침묵을 사유하게 하는 철학적 체험이다. <영원과 하루>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 질문을 안고 극장을 나서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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