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완성되지 않는다, 도심형 국립공원이 된 금정산을 바라보며
박철 (탈핵부산시민연대 전 상임대표)
금정산은 이름 그대로 금빛 우물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신라 문무왕 때 범어사가 창건될 당시, 산 꼭대기 부근에서 황금빛 물이 솟아나는 우물이 발견되었는데, 이 신비로운 우물을 ‘금정’이라 불렀다. 전설에 따르면 하늘에서 내려온 금빛 물이 마르지 않고 솟아나 산을 성스러운 공간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우물은 불교적 성지로서 금정산의 위상을 굳히는 상징이 되었으며, 이후 산 전체가 금정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금정산은 단순한 지리적 명칭을 넘어, 신성함과 풍요, 보호의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 바다와 강, 평야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자리한 이 산은 예로부터 부산 일대 사람들에게 정신적 중심이자 자연적 울타리로 인식되어 왔다. ‘금정산’이라는 이름에는 자연과 인간, 신앙과 삶이 오랫동안 겹쳐온 시간의 흔적이 깃들어 있다.
부산 시민이 아끼고 사랑하는 금정산이 2025년 10월 대한민국 24번째이자 최초의 도심형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부산시는 바다와 강, 그리고 산이 어우러진 도시의 완성이라고 자찬했고, 언론은 최초의 도심형 국립공원이라고 예찬한다. 축하의 말들은 빠르고 요란했다. 그러나 나는 그 말들 속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을 느꼈다. 자연이 국가의 이름으로 호출되는 순간, 그 자연은 과연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보호라는 말 뒤에 숨은 관리의 의지, 공공이라는 말 뒤에 가려진 소유의 욕망이 나를 오래 붙잡았다.
완성이라는 말은 언제나 인간의 언어다. 인간은 무언가를 완성하고, 끝맺고, 결론 내리기를 좋아한다. 도시도 그렇고 정책도 그렇다. 그러나 자연에게 완성이란 없다. 자연은 늘 과정이며, 순환이며, 열려 있는 운동이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잎이 무성해지고, 가을이면 나뭇잎이 떨어지고, 겨울이면 모든 것이 멈춘 듯 보이지만 그 속에서 다음 봄을 준비한다. 자연은 결코 이제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은 자연을 향해 자주 말한다. 이제 보호해야 한다, 이제 관리해야 한다, 이제 관리 제도 속으로 들여와야 한다고.

금정산은 이미 오래전부터 부산의 산이었다. 법률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 행정구역이 아니라 일상의 호흡 속에서 시민들의 산이었다. 도시의 공기가 답답해질 때, 마음이 막힐 때, 사람들은 별다른 약속 없이 금정산으로 향했다. 출근 전 새벽의 산길을 걷는 이도 있었고, 주말마다 도시락을 들고 오르는 가족도 있었다. 누군가는 혼자 오르며 자기 삶을 정리했고, 누군가는 말없이 걷다가 울음을 삼켰다. 금정산은 그런 사람들을 가려 받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입장권을 요구하지 않았고, 이용 시간을 제한하지도 않았다. 산길 곳곳에는 삶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다. 땀이 스며든 바위, 발길에 닳은 흙길, 누군가 잠시 앉아 숨을 고르다 떠난 자리. 절벽 아래에서 바라보는 낙동강의 흐름은 늘 같으면서도 늘 달랐다. 날씨에 따라, 계절에 따라, 마음에 따라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범어사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단순한 종교적 신호가 아니라, 도시의 시간과 다른 그 모든 것은 하나의 질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설계한 질서가 아니었다. 계획도면으로 그릴 수 없고, 관리지침으로 규정할 수 없는 질서였다. 금정산의 질서는 자연과 사람이 오랜 시간 서로를 길들인 결과였다. 사람은 산을 완전히 소유하지 않았고, 산은 사람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 그 느슨한 공존이 금정산을 금정산답게 만들었다. 이제 그 산은 ‘도심형 국립공원’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듣기에는 그럴듯하다. 그러나 말이 붙는 순간, 사유는 경직된다. ‘도심형’이라는 수식어는 자연을 도시의 기능 중 하나로 편입시키겠다는 선언처럼 들린다. 자연은 더 이상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도시를 더 살기 좋게 만드는 요소, 브랜드를 강화하는 자산, 관광을 유치하는 자원으로 호출된다. 자연은 여전히 자연이지만, 동시에 도시 정책의 일부가 된다. 국립공원 제도는 분명 필요하다. 한국 사회에서 개발의 압력은 너무도 강력했고, 보호 장치 없이 자연은 쉽게 훼손되어 왔다. 국립공원 지정은 무분별한 개발을 막고, 생태계를 보전하며,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중요한 제도적 수단이다. 금정산에 서식하는 멸종 위기종과 다양한 식생, 오랜 불교 문화의 흔적을 체계적으로 지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지정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보호는 언제나 질문을 동반해야 한다. 무엇을, 누구를, 어떤 방식으로 보호하는가. 보호의 주체는 누구이며, 보호의 대상은 누구인가. 보호라는 말은 중립적으로 들리지만, 실제로는 강력한 권력의 언어다. 보호를 선언하는 순간, 누군가는 규제의 대상이 된다. 자연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사람의 삶이 제약될 때, 그 보호는 과연 정당한가. 금정산의 사유지 비율이 약 79%에 이른다는 사실은 이 질문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 산 아래, 산 중턱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에게 국립공원 지정은 축하만은 아니다. 농사를 짓던 방식이 제한되고, 집을 고치는 일조차 허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공ᄋퟄᆨ이란 명분은 때로 개인의 삶을 침묵시키는 가장 강력한 명령이 된다. 자연을 위해서라는 말 앞에서, 사람은 쉽게 이해를 강요받는다.
문제는 자연과 사람이 대립하는 구조로 이 상황이 설명된다는 데 있다. 자연을 보호하려면 사람을 물러나게 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근대적 자연관의 산물이다. 자연은 인간이 손대지 않아야만 순수하다는 생각, 인간의 흔적이 남는 순간 자연은 훼손된다는 이분법적 사고. 그러나 금정산의 자연은 그런 방식으로 존재해 오지 않았다. 금정산은 늘 사람의 발걸음과 함께 존재해 왔고, 그 공존의 시간 속에서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다. 범어사는 그 상징적인 예다. 범어사는 자연을 배제한 종교 공간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수행과 일상이 이어져 온 공동체였다. 산은 사찰을 품었고, 사찰은 산의 일부로 살아왔다. 그 오랜 시간은 자연과 인간이 반드시 적대적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국립공원 지정 이후, 이러한 공동체의 삶이 어떻게 존중될 것인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행정은 상생발전 협약을 말한다. 그러나 상생이라는 말은 너무 자주 추상적으로 사용된다. 상생은 숫자로 환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관광객 몇 명을 유치했는지, 지역 경제 효과가 얼마인지를 상생의 기준으로 삼는 순간, 자연은 다시 경제의 언어로 환원된다. 생태관광이라는 이름 아래, 산은 상품이 되고, 풍경은 콘텐츠가 된다. 그 과정에서 자연의 침묵은 배경음으로만 남는다. 금정산의 국립공원 지정은 자연 보전이라는 명분 아래 이루어졌지만, 그 이면에는 여러 우려가 공존한다.

첫째는 자연의 보호가 곧바로 과도한 관리로 이어질 가능성이다. 국립공원이라는 제도는 개발을 제한하는 대신, 탐방로·시설·이용 규칙을 촘촘히 설정한다. 이 과정에서 산은 스스로의 질서보다 행정의 기준에 따라 작동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 자연은 살아 있는 존재라기보다 관리 대상, 통제 가능한 환경으로 인식될 위험이 있다.
둘째는 생태관광 중심의 활용 논리다. 국립공원 지정 이후 관광객 증가와 지역 경제 효과가 강조되면, 산의 가치는 방문객 수와 소비 규모로 환산되기 쉽다. 이는 자연을 보전의 대상이 아닌 콘텐츠로 전환시키며, 금정산을 조용한 산이 아닌 자연 테마파크로 만들 우려를 낳는다. 탐방객 집중은 오히려 생태계 훼손을 가속화할 수 있다.
셋째는 주민 삶에 대한 제약이다. 금정산 일대는 사유지 비율이 높아, 국립공원 지정은 토지 이용 제한과 생업 규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보호를 위한 규제가 산 아래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일상을 억압한다면, 보전은 사회적 갈등을 낳는 명분이 될 수 있다. 자연을 지킨다는 이유로 사람의 삶이 배제될 때, 그 정책은 지속 가능성을 잃는다.
마지막으로,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는 인식의 강화다. 국립공원은 ‘보호 구역’이라는 경계를 통해 자연을 인간의 일상에서 분리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금정산은 오랫동안 사람과 함께 호흡해 온 산이었다. 그 공존의 기억이 사라질 때, 우리는 자연을 이해하는 능력 또한 잃게 될 것이다. 국립공원 지정 이후 진정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규제가 아니라, 자연을 대하는 태도의 성찰이다.
나는 금정산이 자연 테마파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테마파크는 안전하고 편리하며, 무엇을 보게 될지 미리 약속된 공간이다. 모든 동선은 설계되어 있고, 모든 경험은 관리된다. 사람은 길을 잃지 않도록 안내받고, 불편하지 않도록 보호받는다. 그러나 산은 원래 그런 장소가 아니다. 산은 예측 불가능한 공간이다. 때로는 길을 잃고, 때로는 비를 맞고, 때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내려오는 곳이다. 정상에 오르지 못해도, 풍경을 보지 못해도, 그 자체로 실패가 아닌 곳. 바로 그 불확실성과 무용함이 산의 본질이다. 국립공원이라는 이름 아래 그 불확실성이 제거되는 순간, 우리는 자연을 얻는 대신 자연의 흉내, 잘 연출된 풍경만을 소비하게 될지도 모른다.
금정산은 오랫동안 침묵 속에서 사람을 품어왔다. 그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라 기다림이었다. 사람의 말과 욕망이 지나가기를, 소란과 열기가 사그라지기를 묵묵히 견디는 침묵이었다. 계절이 바뀌고,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자연의 시간 속에서 산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행정의 시간은 짧다. 정책은 몇 년 단위로 바뀌고, 제도는 시대에 따라 수정된다. 그러나 산의 시간은 다르다. 금정산은 수백 년, 수천 년의 시간을 살아온 존재다. 국립공원 지정이라는 사건도 그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는 하나의 작은 파문에 불과할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 파문이 사라진 뒤에도, 산이 여전히 자기 자신의 리듬으로 숨 쉬고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그러나 그 파문이 어떤 흔적으로 남을지는 결국 인간에게 달려 있다. 우리가 이 산을 여전히 관리 대상으로만 바라본다면, 금정산은 점점 말이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보호의 이름으로 길을 정하고, 기준을 세우고, 금지와 허용의 선을 그을수록 산은 점차 행정의 언어로 번역될 뿐,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갈지도 모른다. 반대로 우리가 이 산을 하나의 관계적 존재,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받아들인다면, 제도의 틀 속에서도 자연은 여전히 숨을 쉴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규정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 규정을 운용하는 인간의 시선과 태도다.

진정한 국립공원은 법령이나 관리계획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들의 일상적인 태도 속에서, 매일 새롭게 만들어진다. 산을 오르는 걸음걸이 하나, 소리를 내는 방식 하나, 머무르고 떠나는 태도 하나하나가 곧 국립공원의 얼굴이 된다. 도심의 빌딩 숲 사이에서도 우리가 잠시 속도를 늦추고, 효율과 편의의 논리를 내려놓으며, 소유가 아니라 공존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금정산은 이름에 걸맞은 국립공원이 될 것이다.
금정산은 이제 제도의 언어로 불리게 되었지만, 여전히 바람은 스스로 분다. 억새는 어떤 허가도 기다리지 않고 흔들리며, 계곡물은 관리 계획과 무관하게 제 갈 길을 흐른다. 그 자연의 자율성과 무심한 자유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지키는 일, 그것이 국립공원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책임일 것이다. 보호란 통제가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도록 내버려두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산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산은 오래전부터 늘 말을 걸어왔다. 우리가 그 소리를 듣지 않았을 뿐이다. 이제 금정산이라는 이름 앞에 ‘국립’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지금, 우리는 다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 산을 정말로 보호하고 있는가, 아니면 더 정교한 방식으로 소유하고 있는가. 그 질문을 놓지 않는 한, 금정산은 제도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산으로 남을 것이다. 도심 한가운데서도 자연은 제도보다 깊고, 인간의 언어보다 오래된 진실을 품고 있다. 그 진실을 잊지 않는 한, 금정산은 앞으로도 우리에게 길을 가르칠 것이다. 말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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