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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서평] 걷다 보면 뭔가가 달라짐

by 웹진수이제 2026. 2. 12.

 

걷다 보면 뭔가가 달라짐 -『미래산책연습』(박솔뫼 지음, 문학동네, 2021) 

 

김지혁 (수이제) 

 

산책 

산책을 좋아한다. 일이 풀리지 않고 머리가 핑핑 돌 때는 자리를 박차고 산책을 나가는데, 걷다 보면 뭔가가 해소된다. 또 산책은 예기치 않은 만남을 가능케 한다. 얼마 전에는 밤길을 걷다 가 주차장에서 녹색 슬리퍼 한 짝을 만났다. 너는 어쩌다가 제자리에 있지 않고 여기 있니 다른 한 짝은 어디 갔니 물어보다가 녹색 슬리퍼를 신었던 사람을 떠올려본다. 이 자리에서 슬리퍼를 벗고 다른 신발로 갈아 신었을까 아니면 맨발로 집까지 걸어갔을까? 지금 여기 없는 사람을 떠올리다 보면 과거의 세상과 내가 이어져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떻게 생활하고 어떻게 쓰는지에 관해 이야기를 하다 보면 무슨 이야기를 하든 결국 산책하는 이야기, 걷는 이야기로 향하게 된다. 향하게 된다기보다 걷고 걷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어색하다고 해야 할까.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가능은 하겠지만 산책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 더라도 결국은 산책하는 이야기로 흘러가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박솔뫼의 글은 산책 경험으로부터 시작된다. 산책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결국 산책하는 이야기로 흘러가버린다는 기분은 무엇일까? 아마도 걷는 행위 속에서 우연히 무언가를 만나고, 다른 시간을 감각하고, 타인을 상상하는 느낌일 것이다. 그는 “무슨 이야기를 하든 결국 산책하는 이야기, 걷는 이야기로 향하게 된다”며 걷다 보면 “지나치는 사람들, 변화하는 계절, 그리고 바람과 마주치고 이들은 나를 들었다 놓으면서”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이 보인다고 말했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느끼는 산책자의 태도는, 박솔뫼의 소설이 역사를 마주하는 독특한 방식과 이어진다.

 

망각과 기억의 가장자리에서 

역사적 사건을 마주할 때 우리는 종종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한다. 하나는 망각의 정치이고, 다른 하나는 기억의 정치다. 망각의 정치가 국가나 주류 사회가 불편한 진실을 덮고 침묵하는 방식이라면, 기억의 정치는 망각에 저항하여 과거사를 복원하고 이를 기린다. 하지만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피해자들을 기억한다는 의미에서 시작한 기억의 정치가 당초의 목적과는 달리 오히려 또 다른 폭력을 낳는 기만의 기술로 전락하는 역설이 발생하기도 한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하 부미방 사건)의 가담자 문부식은 광주가 국가에 의해 공인된 정사(正史)가 되는 과정을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국가가 주도하는 기억의 정치는 특정 기억에만 기억할 만한 자격을 부여하고, 성공한 항쟁의 서사를 구축한다. 이 과정에서 그 거대 서사에 들어맞지 않는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나 개인의 복잡한 상흔은 지워지거나 주변화된다. 망각에 저항하기 위한 기억이, 또 다른 종류의 망각을 만들어내는 기만의 기술이 되고 마는 것이다. 성공한 항쟁은 기념될 뿐, 그 안의 모순과 고통은 거슬러 기억되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어떤 형태로, 무엇을 위해 기억할 것인가의 문제는 결국 권력의 문제로 이어진다. 국가가 공인하고 기념하는 방식의 거대 서사로서의 기억의 정치는, 그 틀에 맞지 않는 개인들의 생생한 현실을 지워버린다. 

 

이 양극단의 폭력 사이에서, 거대 서사가 포착하지 못하는 개인의 파편적인 기억과 목소리를 어떻게 복원할 수 있을까? 박솔뫼가 채택하는 윤리적 태도는 산책이다. 산책은 정해진 목적지(완결된 역사)를 향해 직선으로 나아가는 행위가 아니다. 산책은 목적 없이 걷는 과정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것들에 주목하고,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주의를 기울이는 실천이다. 

 

소설 『미래산책연습』은 이러한 산책의 윤리를 서사로 구현한다. 소설가인 '나'는 부미방 사건의 가담자 김은숙을 조사하기 위해 부산이라는 공간을 직접 걸어 다닌다. 그러다 목욕탕에서 우연히 최명환을 만나고, 그가 부미방 사건 당시 그 자리에 있음을 알게 된다. ‘나’는 부미방의 공식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최명환의 성추행 경험에 귀를 기울인다. 이는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역사의 위계에 저항하며, 모든 개인의 고통을 동등하게 마주하려는 산책자의 윤리적 태도다. 

 

또 서사의 다른 축인 수미와 윤미 언니의 이야기는 사건 이후의 삶을 따라 걷는다. 거대 서사는 역사적 인물을 사건의 순간에 박제하지만, 수미는 윤미 언니의 평범한 일상을 함께하며 그를 현행하는 삶 속으로 되돌려 놓는다. 수미는 “사람들이 언니를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사라질 것”을 염려하며 개인적인 기록을 다짐하는데, 이는 윤미를 단지 부미방 사건의 가담자로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 대하려는 윤리적 태도이다. 

 

소설의 이중 서사 구조는 사건을 하나의 시점으로 봉합하기를 거부한다. 이는 완성된 역사를 제시하는 대신, 배제된 기억(최명환)에 귀 기울이고 박제된 기억(유미)과 함께 하면서 과거완료형 사건을 현재 진행형으로 되살린다.

 

기억과 서사의 윤리 

앞서 우리는 저자가 망각과 기억의 정치 대신 산책을 통해 파편적인 목소리들과 만나는 방식을 살펴보았다. 산책은 정해진 목적 없이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장소, 사람, 기억들 앞에서 멈춰 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산책의 방식이 역사적 사건을 대하는 윤리적인 태도가 될 수 있을까? 왜 저자는 명료한 재현 대신, 길을 잃는 듯한 불친절한 서사를 택해야만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는 오카 마리가 『기억, 서사』에서 제시한 트라우마적 사건과 그것을 재현하는 방식의 문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카 마리는 전쟁이나 학살 같은 거대한 폭력적 사건은 결코 매끄럽고 완결된 서사로 재현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사건을 리얼하게 재현하려는 욕망은 오히려 그 폭력의 핵심을 은폐한다. 완성된 그림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바로 그 완성됨 때문에 그림에 표상될 수 없었던 사건의 잉여, 즉 말할 수 없는 고통의 흔적을 지워버린다. 

 

이러한 재현의 불가능성은 기억의 본질 자체에서 기인한다. 기억은 우리가 통제하고 관리하는 데이터가 아니라, 마르셀 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주체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현듯 덮쳐오는 습격이다. 기억이 주체가 되어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고, 통제 불가능한 파편으로 몸에 새겨진다. 박솔뫼의 산책은 이 지점에서 오카 마리의 기억과 조응한다. 산책은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 탐정의 조사가 아니라, 기억의 습격을 기다리며 자신을 열어두는 태도다. 산책자는 불현듯 도래하는 기억의 파편 앞에서 멈춰 서서 그것의 이야기를 상상할 뿐이다. 

 

소설의 뒤섞인 시제, 불분명한 주어, 뚝뚝 끊기는 대화는 윤리적 태도와 이어져 있다. 그것은 통제 불가능하고 파편적인 기억의 습격을 그대로 노출시킨다. 저자는 완결된 서사가 가하는 폭력에 저항하며, 재현 불가능성 자체를 드러낸다. 그의 소설은 독자가 안전한 구경꾼으로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기억들의 파편들을 직접 마주하고 길을 잃는 경험을 공유하게 만든다. 

 

원하는 미래를 연습하기 

과거의 사람들이 가져오려 애쓰던 미래는 여전히 미래로 여겨지고 내가 그리던 미래도 미래에는 다시 되살리고 싶은 미래가 될 것이다. 원하는 미래를 그리고 손으로 만져보기 위해 어떤 시간을 반복해야 할까. 나는 그것을 우선 어딘가에 써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윤리란 언제나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불가능한 것을 향해 나아가는 운동이라고 말한다. 데리다에게 정의는 법과 제도를 통해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도래할 정의로만 남는다. 애도 또한 완성된 애도가 아닌 불가능한 애도로만 남는다. 정의는 결코 종결될 수 없고, 애도는 늘 불충분하다. 이러한 불가능성을 인정하고 그 불가능성에 계속해서 응답하는 시도가 데리다의 윤리다. “원하는 미래를 손으로 만져보기 위해 써두는” 것은 불가능한 것에 응답하는 행위이다. 

 

과거의 사람들이 그렸던 미래를 상상해본다. 현재는 단순히 지금이 아니라 “과거의 사람들이 가져오려 애쓰던 미래”의 일부일 것이다. 80년 광주항쟁의 사람들이 그렸던 미래, 82년 부미방 사건의 청년들이 그렸던 미래, 그리고 24년 12월 국회 앞에 선 사람들이 가져오려 애쓰던 미래들을 상상해 본다. 원하는 미래를 “여러 번 반복하여 익히고 걸치고 입어버리면”, 우리는 “미래에 익숙해지고 미래를 손에 만져본 적이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매일 연습하다 보면, 조금씩 다르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