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 속에 싹트는 긍정의 정동
-『달라붙는 감정들』(김관옥 외 지음, 아몬드, 2024)
김기태 (수이제)

참사가 지나간 자리
세월호 참사와 코로나19 확산과 이 태원 참사, 오송 참사... 오늘도 반복되는 사회적 참사들은 우리 몸과 마음에 무엇을 남겼을까. 『달라붙는 감정들』에서 다섯 명의 인류학자가 일상을 무 대로 연이어 벌어진 참사의 자취 속에 놓여 있는 우리의 정동에 대해 묻는다. 저자들은 반복되는 참사 속에서, 우리 각자의 삶에 끈적하게 엉겨 달라붙는 감정이나 정서를 ‘정동’이라 부르며 이 를 주관적이고 일시적인 감정과 다르 다고 말한다.
이 책을 읽고나서 나는 무겁고 답답 한 감정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참사의 모습과 아직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의 흔 적 속에서 서평을 적는 것조차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는 송구스러운 것이 아닌가. 나의 주관적인 견해보다는 책 속에 전개된 참사와 아픔의 모습을 알리고 전달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것이다.
현장의 목소리
세월호 리본을 달고 다니던 청년이 이태원에서 죽었습니다.
이태원에서 리본을 달고 다니던 청년이 오송 지하차도에서 죽었습니다.
밀려오는 인파 속에서 숨이 멎는 마지막 순간까지 살려달라고 목이 쉬도록 외친 이태원의 젊은이들! 배안의 마지막 모습을 보관한 휴대전화에는 천진난만한 사진과 영상이 뚜렷이 보이고 그곳에 그들의 밝은 웃음이 비추어진 배가 기울어지고 물이 차오르는 순간까지의 긴장과 두려움, 친구와 선생님을 걱정하는 목소리!
빨리 오지 않는 구조대, 해경, 어른들을 향한 욕설!
엄마, 아빠 가족에게 남기는 사랑한다는 마지막 메시지. 그 외침에 나라도 어른들도 응답하지 않았다. 응답하지 않음은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아이들에 안타까운 상황에 대한 공감 능력, 구해야겠다는 절실함이 사라져 버렸는지 모른다. 신고와 절규, 긴급한 요청들에 대해 결국 제대로 응답한 것이 없었다. 텔레비전 생중계를 통해 배가 침몰하고 아이들이 가라앉는 모습들을 우리는 너무도 생생하게 넋을 잃고 바라봐야 했다.
잃어버린 것과 포르노그래피적 희열
많은 것이 무너졌다. 보이지 않는 가치와 존중, 믿음들이 아이들과 함께 깊은 바다속으로 가라앉았다. 팽목항에 올라온 시신들은 손톱이 까맣게 무디어졌고 갈라지고, 부서졌다. 문을 긁으며 유리창을 두드리고. 살려달라는 마지막 숨결을 내쉬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그곳에 나라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모든 재난을 나라에서 다 막아줄 수는 없다. 어쩔 수 없이 재난이 발생할 수 있으며 모든 재난을 예측할 수 없음을 수용하자. 예측할 수 없는 재난에 대한 구조는 이와 다르다. 제 때에 응답해 주어야 했다. 피해자들은 참사 발생 전부터 계속해서 그들이 배운 방식대로 구조 신호를 보냈다. 119에 연락했고, 경찰서에 신고했다.
이태원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사건 발생 전후에 120번 넘게 위험을 알리고 구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경찰은 늑장을 부리고 무관심했다. 나라는 막연하고 모호한 실체가 아니다. 나라의 부재는 추상적 사실이 아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을 회피하고 늑장을 부렸다. 심지어 그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상관에 대한 의전과 접대에 몰두하던 공무원들의 실제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아무리 전 국민이 울부짖어도 공무원들은 자신들의 몫을 챙기려 했다.
관료 집단의 영역 싸움이 버젓이 존재했고 재난 이후의 회복에 대책에 있어서도 일방적인 방향으로 이끌려 갔다. 그들의 움직임이 분주했지만 공무원 조직에는 냉랭한 기운이 가득하고 그곳에는 오로지 숫자만 떠돌았다. 현재 실종자 수는 몇 명! 그중 몇 명이 구조되고 사망자는 몇 명... 칠판에는 마치 스포츠 중계에서 보듯이 알 수 없는 복잡한 숫자들이 난무했다. 전문가들이 텔레비전 앞에서 펼치는 수많은 도표와 총계 자료들은 아이들과 젊은이들의 절규와 눈물마저 삼켜 버렸다. 또한 재난과 참사 이후 양분되는 한국 사회의 실상들이 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지를 생각해 본다. 필자는 그 현상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불평등한 사회에 분노를 품는 사회적 약자들은 구조적 원인을 생각하기보다는 기득권의 의도대로 자기 것을 위협하거나 억압하는 대상을 주변에서 찾는다.
예컨대 현대사회의 신속한 변화에 적응이 어렵고 소외된 노인 집단들에게는 보상을 받는 세월호 유가족이 그들의 권리와 이득을 빼앗아가는 무리로 보일 수도 있다. 유가족을 “악”으로 규정해 버리고 그들을 미워하거나, 혐오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자기기만 속으로 빠진다. 심지어 이 나라를 위해 이러한 혐오와 학대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는다. 무시와 비난을 넘어 마침내 폭력과 폭언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어버이 연합의 노인들이 쉽게 납득하기 어려울 만큼 적극적으로 세월호 유가족 혐오에 나서는 이유 중 하나다.
주변의 관람자들은 혐오와 비난의 전선을 흥미롭게 바라본다. 카롤린 엠케는 이를 “포르노그래피적 희열”이라 했다. 그들은 직접 비난에 참여하지 않지만 불난 집을 구경하는 관람객 노릇을 하며 전선을 정당화한다. 이러한 구경꾼들의 방관을 등에 업은 혐오 세력들은 기세가 등등해진다.
폭력의 위험을 막기 위한 경찰은 비난을 당하는 유가족들이 문제인 듯 오히려 그들을 마주 본다. 이렇게 공권력이 피해자들을 배척하고 폭력 세력에게 동조하는 모습은 이제 낯설지 않다. 혐오 담론 속에서 사람들은 유가족들을 하나의 집단으로만 취급한다. 익숙한 상징과 극단의 이데올로기의 가면을 씌우면서 끊임없이 정형화된 방식으로 개인적, 개별적 인격을 말살한다. 그들을 집단으로 묶어 버리고 단순한 숫자로 치환하려 한다.
그 속에 유가족들의 고통과 슬픔은 짓눌려져 버린다. 이러한 정동의 양분화를 부추기고 조장하는 세력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극단적 혐오와 갈등을 통해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집단은 누구인가? 정치인들인가? 아니면 편향된 이익집단들인가?
그럼에도, 회복하는 공동체
그러나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뒤 전국 방방곡곡에서 자원봉사자들이 팽목항과 안산으로 몰려들었다. 밥과 국을 제공하고 사람들의 옷을 갈아입히고 함께 기도하며 충격과 슬픔에 잠긴 이들에게 무료 심리 상담도 해 주었다. 실종 학생의 부모들은 팽목항 현장에서 13인의 위원회를 꾸리고 토론회를 열었다.
문제점을 찾아내고 구조 방향을 결정했으며 아무 대책 없이 방치되어 있던 시신처리, 이동, 장례 절차를 조율하고 처리했다. 순전히 자발적 공동체였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매년 4월 16일과 10월 29일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외면하고 무심하게 내버려두려 해도 달라붙는 감정은 어쩔 수 없이 그날의 아픔과 슬픔과 미안한 자책의 정동 속으로 빨려들게 한다.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것이다.
이 책은 다섯 명의 인류학자들이 각자의 공간에서 참사의 현장을 마주하면서 단지 애도와 추모에만 머물지 않고 계보학적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정동과 참사의 상관적 관계를 추적하고 기록했다. 슬픔에 젖어있고 비관 속에 빠진 유가족들은 삶의 방향을 잃어버렸다.
이 책은 미약하나마 그들에게 손을 내밀고 싶어 했고 추상적이기보다는 일상적이고 구체적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려는 의지를 보여 주었다. 아주 작고. 세세 하지만 일일 시간표처럼 어느 곳으로 향할 것인가를 희망의 좌표로 표시하려 했다. 그렇게 조금씩 긍정의 정동들이 새싹처럼 움트기를 바라면서 이 책을 기획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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