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하나가 아니다 — 『오늘날의 애니미즘』
김지혁 (수이제)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전 세계적 신드롬을 일으킨 곤도 마리에(줄여서 곤마리)의 이 유명한 정리법은 특이한 구석이 있다. 그는 쓸모를 다한 물건을 버릴 때 “그동안 고마웠어”라며 다정하게 작별 인사를 건넨다. 곤마리는 물건에도 기분과 감정이 있다며, 벽장 깊숙이 처박혀 잊힌 물건들은 감옥이나 외딴 섬에 갇혀 있는 것이므로 버릴 때는 지금까지 감사했다는 마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곤마리 정리법에서 옷을 개키는 행위는 "언제라도 자신을 돋보이게 해주는 옷을 위로하고, 애정을 표하는 행위"다.
곤마리의 정리법은 사물을 단순한 무생물적 수단이 아닌 나와 교감하는 생명력을 지닌 존재로 대하는 21세기의 사상들과 맞닿아있다. 인류학자 오쿠노 카츠미는 현대인들이 곤마리에 열광한 현상 속에서 애니미즘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지적한다. 사물에 대한 설렘과 인사는 단순히 미신적인 것이거나 낭만적인 의인화가 아니라 인간이 비인간 존재와 마음으로 관계 맺는 방식이 될 수 있다.

'애니미즘'이라는 단어에는 나무와 돌에 정령이 깃든다고 믿는 원시적 신앙, 혹은 샤먼이 북을 두드리며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장면이 연상된다. 19세기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타일러는 ‘애니미즘’을 자연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태도, 즉 진화론적 발전의 출발점이자 과학이 극복해야 할 유아기적 세계관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이 책의 두 저자 오쿠노 카츠미와 시미즈 다카시는 그 정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책의 제목인 『오늘날의 애니미즘』(2024)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고전 『오늘날의 토테미즘』(1962)을 염두에 두고 있다. 두 저자는 애니미즘을 단순히 부정하거나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21세기의 언어로 다시 사유하고자 한다. 저자 오쿠노 카츠미는 홋카이도의 아이누족과 인도네시아의 푸난족을 연구해온 현장 인류학자이고, 시미즈 다카시는 불교학자이면서 현대철학과 인류학의 교차점에서 활발히 작업해온 사상가다. 두 사람은 번갈아 글을 쓰고 서로의 논의를 이어받으며 대화하는 방식으로 책을 구성했다. 인류학과 불교학이라는 두 개의 시선이 교차하면서 애니미즘이라는 오래된 주제를 새로운 경로로 이끈다.
인류학의 존재론적 전회: 하나의 세계라는 편견을 부수다.
이 책의 논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20세기 인류학이 직면했던 한계와 존재론적 전회의 의미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20세기 초반의 전통적인 인류학은 제국주의 서구가 식민지인 비서구를 연구하는 위계적인 구도 속에서 출발했다. 이들은 세계는 객관적으로 단 하나이며, 각 문화권은 그 하나의 세계를 각기 다르게 인식할 뿐이라고 믿었다. 이를 인식론적 연구라 한다.
그러나 이 인식론적 구도에는 치명적인 함정이 있다. 세계가 단 하나라면, 다양한 문화적 인식들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더 올바른 인식과 틀린 인식의 우열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진리의 척도는 언제나 단 하나의 세계를 과학적으로 상정해 낸 서구의 인식론이 차지했다. 비서구인들의 삶의 방식과 믿음은 한낱 흥미로운 오답이거나 은유적 상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후 등장한 탈근대 인류학이 서구 중심주의적 사유를 해체하려 시도했지만, 메릴린 스트래선이 지적했듯 이는 문화를 잘게 파편화시키고 정치적 기회주의나 상대주의만을 남겼을 뿐, 인류의 문화 자체를 근본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21세기 인류학의 ‘존재론적 전회’가 등장했다. 브라질의 인류학자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의 다자연주의가 그 핵심이다. 그는 서구의 다문화주의를 비판한다. 다문화주의는 '하나의 자연, 다수의 문화'를 전제한다. 자연은 과학이 탐구하는 단일한 실재이고, 문화는 그것을 다르게 해석하는 방식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자연도 복수일 수 있지 않을까? 아마존 원주민들의 관점주의가 보여주듯, 재규어에게는 재규어의 세계가 있고, 독수리에게는 독수리의 세계가 있다.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오늘날의 애니미즘』의 저자들도 애니미즘을 특정한 문화권에 할당된 낡은 세계관이 아니라, 삶을 영위하고 행동하며 관계 맺는 방식에서 생겨나는 ‘복수의 존재론’으로 해석한다.
사냥꾼의 모피: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지우는 실천들
이 책에서 인상적인 대목 중 하나는 시베리아 유카기르족 사냥꾼에 대한 이야기다. 유카기르족 사냥꾼들은 엘크를 사냥하기 전, 인간의 체취를 완전히 없애고 엘크의 모피를 두른 채 엘크의 행동을 철저히 모방한다. 인류학자 라네 빌레르슬레우의 관찰에 따르면, 이때 사냥꾼은 단순히 동물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과 비인간의 정체성 사이, 그 기묘하고 ‘낯선 곳’을 실제로 차지한다.
저자는 이 장면을 단순한 사냥 기술로 해석하지 않는다. 사냥꾼은 "인간과 비인간의 정체성 사이의 낯선 곳"에 존재한다. 그는 외적으로 엘크와 거울 관계를 맺으면서도, 내적으로는 통합되지 않는 무수한 혼들과 뒤얽혀 있다. 이 덕분에 그는 엘크를 배신할 수 있다—즉, 사냥할 수 있다. 어떤 단일한 관계로도 환원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자유롭다.

이 이야기가 흥미로운 건 주체와 객체, 안과 밖이라는 이분법 바깥을 살아내는 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냥꾼은 엘크를 외부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주체가 아니다. 그렇다고 엘크 속으로 완전히 녹아드는 것도 아니다. 그는 모피를 두른 존재다. 경계 위에 선 존재. 이것이 바로 애니미즘의 세계관이 포착하고자 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삼분법과 테트랄레마: 이항대립을 탈출하는 불교적 사유
불교학자 시미즈 다카시 사상의 핵심은 삼분법이다. 서양 근대인의 사고는 흔히 이항대립에 의존한다. 주체/객체, 안/밖, 인간/자연, 삶/죽음. 이 대립 구도 속에서 우리는 하나를 택하거나, 둘을 종합하거나, 둘 사이를 오간다. 하지만 시미즈는 이 이항대립 자체가 특정한 형이상학적 선택임을 지적한다. 삼분법은 단 하나의 이항대립을 절대화하지 않고, 서로 다른 이항대립들을 조합하고 재조합함으로써 어떤 대립에도 일방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유의 공간을 만든다.
이것은 초기 불교의 사유 방식인 '사구(四句분별)', 즉 테트랄레마와 맞닿아 있다. 테트랄레마의 네 명제는 아래와 같다.
1. 모든 것은 진실이다. (긍정)
2. 모든 것은 진실이 아니다. (부정)
3. 모든 것은 진실이며 또한 진실이 아니다. (긍정과 부정의 병존)
4. 모든 것은 진실인 것도 아니며 또한 진실이 아닌 것도 아니다. (양자의 초월적 부정)
서구의 사유가 1과 2 사이의 이항대립에 머물렀다면, 애니미즘의 세계는 제4명제(제4렘마)에 이른다. 주체이자 대상이고, 안이자 바깥인 역설의 공간. A도 아니고 A의 부정도 아닌 지점에서 다른 종류의 사유가 시작된다.
이는 서구적 우주관과 불교적 우주관의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훔볼트의 코스모스가 관찰자가 한 걸음 물러서서 외부의 시선으로 감상하는 조화롭고 미적인 우주라면, 불교의 만다라는 관찰자가 행위자로서 그 중심에 직접 걸어 들어갈 때 성립하는 역동적인 움직임의 우주다. 그 세계에 들어서는 순간, 나와 나무, 나와 돌, 나와 고양이 사이의 견고했던 경계는 지워진다. 우리는 각자가 대일여래의 분신이 되어, 세계를 바깥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와 하나가 되어 공명한다. 이것은 신비주의가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외부적 시선을 내려놓고, 세계를 이해하는 것 자체를 문제화하는 순간이다.
인류세의 위기, 그리고 ‘오늘날의 애니미즘’
두 저자들이 최종적으로 도착하는 곳은 과거의 원시 사회가 아니라, 기후 위기와 생태 재난이 발생하는 오늘날이다. 서양 근대의 기획, 즉 주체의 문명과 ‘타자의 야만’을 나누고 자연을 무한한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항대립적 가치관은 이제 수명을 다했다.
인류학자 팀 잉골드는 “인류학의 본질은 사람들과 더불어 인간의 삶을 배우는 것”이라 했고, 아난드 판디안은 인간의 실수 속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탐지하는 긍정 인류학을 주창했다. 21세기의 인류학은 인간만을 연구하는 학문을 넘어, 인간과 인간 이외의 비인간 존재들이 어떻게 서로 뒤얽혀 생존과 번영을 탐색해 왔는지를 살피는 다종 인류학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 맥락에서 애니미즘은 “지상에서 인간만이 유일한 주인이 아니라는 사상”이라는 실천적인 윤리로 재탄생한다. 이는 결코 멀리 있는 거창한 철학이 아니다. 서두에서 언급한 곤도 마리에의 정리법처럼, 근대 자본주의가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단절시켜버린 인간과 사물 사이의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하고, 일상 속에서 타자(비인간 존재)와의 거리감을 좁혀나가는 태도. 이것이 바로 인류세의 위기를 돌파할 『오늘날의 애니미즘』적 실천이다.
애니미즘이 가진 힘은 환시에 있다. 보통의 눈에는 거기에 없다고 생각되는 것을 보는 능력,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과 이미 사라져버린 것들까지 아울러 세계의 존재 방식을 정밀하게 더듬어가는 힘이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는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적 세계관은 오늘날의 애니미즘과 정확히 공명한다. 세상 만물은 저마다 독립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시작도 끝도 없는 세계 속에서 서로를 끝없이 포섭하며 뒤얽혀 있다. 길가의 돌멩이, 낮잠 자는 고양이, 데스크 위의 낡은 머그잔은 나와 무관한 대상이 아니라, 만다라의 우주 속에서 함께 하는 동등한 존재들이다. 이제는 세계를 통제하여 문제를 해결한다는 욕망은 접고, 세계의 속삭임을 듣고 다양한 존재 양태들에 응답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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