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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서평] 하늘을 날아다니는 메두사가 되자—메두사의 웃음 서평

by 웹진수이제 2026. 4. 23.

 

하늘을 날아다니는 메두사가 되자 — 메두사의 웃음 서평

송민석(수이제)

 

메두사의 웃음 표지. 출처:알라딘

 

‘메두사의 웃음’이라는 제목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메두사의 웃음을 본 존재가 있는가?’였다. 신화 속 메두사는 그와 눈을 마주치는 인간을 모두 돌로 만들어 버리는 무시무시한 존재이기에, 그 누구도 메두사의 얼굴을 보고 살아남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메두사가 웃고 있든, 화내고 있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런 궁금증을 가지고 책을 펼친 나에게 이 책은 예상보다도 훨씬 난해했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도 ‘메두사의 웃음’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본문을 몇 번 더 읽어 보고, 덧붙여진 「장미 가시 효과」까지 읽고 나서야 어느 정도 제목과 글의 내용을 연결지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찾은 답은 ‘그렇다’이다.

 

엘렌 식수(이하 식수)는 이 글의 제목을 메두사의 웃음이라고 지었으면서, 정작 본문에서는 ‘메두사’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는 딱 세 번밖에 사용하지 않는다. 그것도 책이 중반을 넘길 무렵에서야. 그 전까지 식수는 다양한 비유와 함께, 여성들에게 “글을 쓰라!”라고 외친다.

 

여성은 자기 자신을 써야/써져야 한다. 즉, 여성은 여성을 써야 하고, 여성들을 글쓰기로 오게 해야 하는데, 그녀들은 자신의 몸에서 난폭하게 멀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와 동일한 이유로, 동일한 법에 의해, 동일하게 치명적인 목적으로 글쓰기에서 멀어졌다. 여성은 자기 자신을 출산하고 역사를 시작하듯이 자발적으로 텍스트에 착수해야 한다.

 

이 외침은 종이에 쓰인 글자임에도 불구하고 화산보다 더 격렬하게 뿜어져 나오는 다양한 감정과 에너지들이 느껴진다. 그것은 절박함이었다가, 분노였다가, 간절함이었다가, 에로스였다가, 마침내는 사랑이 된다. 책을 읽고 있음에도, 마치 많은 군중이 모여 있는 광장에 큰 소리로 울리는 선언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식수는 지금까지의 글들이 얼마나 남성중심적이었는지 이야기한다. 그 역사는 너무 오래되어서, 여성이 쓴 글마저 ‘남성적’인 틀에 갇혀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제는 “여성적 글쓰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성적 글쓰기를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이는 여성적 글쓰기가 기존의 글쓰기와는 형식도, 내용도 모두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식수는 메두사 이야기를 한다.

 

사람들은 우리를 두 개의 끔찍한 신화, 즉 메두사와 심연 사이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했다.

 

메두사를 보기 위해서는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메두사는 치명적이지 않다. 그녀는 아름답고 그녀는 웃고 있다.

 

메두사가 무엇인지 설명을 덧붙이지도 않았지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메두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메두사는 남성적 규범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여성이자, 그들의 욕망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이 여성적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도 말이다.

 

케이트 호지스의 『전사*마녀*여성 - 신화 속의 강인한 여성들』.해리엇 리-메리언이 그림을 그렸다. 출처: https://blog.naver.com/utis0me/

하지만 여성적 글쓰기는 문자로 표기된다는 점에서, 기존의 글쓰기가 가지고 있는 ‘남성성’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식수는 남성적 글쓰기로부터 글쓰기를 ‘훔치(vol)’라고 말한다. 여성들은 “비행(飛行, vol)을 통해서만 그 기술을 획득할” 수 있었다고. 여기서 프랑스어 vol은 하나의 단어이면서 동시에 이중적 의미(언어적 유희)를 갖는다. 먼저, “vol” = 비행의 의미는 억압된 여성 주체가 중력(질서, 법, 규범)을 벗어나 자유롭게 이동하고 탈주하는 운동이다. 철학적 의미로 말하자면 남성중심적 로고스(이성이나 잘서)의 체계로부터 이탈하는 것이고 고정된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유동적 주체성이다. 글쓰기 자체가 하나의 비행이다. 탈주하며 탈중심화하며 생성하는 운동이다.

 두 번째 ‘vol’은 ‘훔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남성중심적 사상에 찌들었긴 하지만 기존 언어나 담론을 가지지 않고서는 글을 쓸 수 없다. 그래서 그 언어나 담론을 훔쳐서 사용할 수밖에 없다. 사용과정에서 변형하여 교란시키며 사용한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글쓰기의 기술로 여성적 글쓰기를 하며 언어 속을 자유롭게 ‘비행’하라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 여성적 글쓰기는 지금까지 억압되어 온 여성의 몸과 욕망을 담아내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서로를 가로지르며 연결하고, 사랑하고 베푸는 것이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규범 역시 흐트러지고, 더 자유롭게 글 속에서 비행할 수 있게 된다.

 

식수의 외침은 어쩌면 다소 식상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미 많은 여성이 글을 쓰고 있고, 여성적인 글을 써야 한다는 이야기는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수도 없이 들었을 이야기니까. 그러나 식수의 다른 글, 「장미 가시 효과」에서 우리는 이 글을 현재에 맞게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장미가시 효과’는 하나의 명시적 개념어라기보다, 그녀의 글 전체를 관통하는 여성적 글쓰기의 역설적 구조를 비유적으로 설명할 때 흔히 사용되는 해석적 표현이다. 장미는 아름다움, 향기, 유혹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가시(상처, 저항, 위험)를 지니고 있다. 즉 매혹적이지만 상처를 받고, 쾌락적이지만 고통스럽고 생산적이지만 파괴가 얽혀있다. 여성의 몸, 성, 욕망이 다시 말하기 시작하면, 단순히 부드럽고 감성적인 것이 아니라 기쁨과 상처, 해방과 위협이 동시에 작동하는 힘이다.

 

출처:  https://www.vogue.co.kr/2026/03/12/

 

「장미 가시 효과」에서 식수는 메두사가 “퀴어의 퀸”이자 “퀴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메두사는 단지 문자 그대로의 ‘여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질서에서 배제된, 흉측하고 끔찍한, 두려운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메두사는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라도 메두사로부터 도망치거나, 페르세우스가 되어 메두사의 목을 베어버릴 수 있다.

 

우리에겐 여전히 금지된 욕망들이 많다. 상상조차 하지 못해 욕망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을 정도다. 예를 들자면, 지금 한국 사회는 이성애 규범에서 벗어난 다양한 섹슈얼리티를 욕망하지 못하게 한다. 단지 동성애나 양성애 관계뿐만 아니라, 다자연애와 같은 형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꼭 성애적인 것만이 아니더라도 각자에게 금지되었다고 느껴지는, 혹은 그렇게 느껴지지 못할 정도로 어두운 곳에 숨겨진 욕망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욕망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있지만 그런 욕망들이 아직 글쓰기를 훔치지 못했거나, 훔쳤더라도 충분히 그 기술을 갈고닦지 못했을 뿐이다. 식수는 그런 욕망들에게 “글을 쓰라!”라고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 글로 쓰여지지 못한 욕망들이 모두 글로 쏟아져 나오려면 우리는 우리 안의 ‘메두사’를 찾아가야만 한다. 추악하고 끔찍한 메두사를 마주하고 돌이 되어 굳어버리지 않고, 그 미소를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그 욕망들은 글로 쏟아져 나올 것이다.

 

식수가 말하는 여성적 글쓰기에서, 글은 몸과 욕망으로 쓰는 것이기에 삶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욕망을 단속하거나 숨기는 삶이 아니라 마주하고 그것을 자유롭게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만 메두사의 웃음을 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안의 메두사를 풀어놓고, 각자 메두사가 되어 자유로워질 것이다.

물론 다른 메두사를 마주하는 것이 매번 즐거운 경험은 아닐 수도 있고, 여전히 어떤 메두사는 조금 꺼려질 수도 있다. 그러나 더 이상 메두사로 인해 돌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메두사의 웃음을 보았기에. 그리고 앞으로도 볼 수 있기에.